#포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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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에 대한 생각
음식 전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비 윌슨은 책 <식사에 대한 생각 원제: The Way We Eat Now | 비 윌슨 지음 |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02월 27일 출간>에서 맛있지만 영양가는 부족한 정크 푸드와 건강식품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싼 가공식품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다룬다. 특히 원재료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공된 식품, 이른바 ‘초가공식품’의 범람과 그로부터 비롯된 비만과 식이 장애들의 문제를 조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다. 그리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도 제시한다.
저자는 전작 와 이라는 책을 통해 음식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대 사회의 식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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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의 신념에서는 스스로를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로 생각하더라도,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대부분 보수주의자가 된다. 우리는 칼로 재료를 자르고, 숟가락으로 젓고, 냄비로 익힌다. 현대적인 부엌에서도 고대인이 썼던 체와 절구와 팬을 쓴다. 우리는 식사를 준비할 때 매번 최초의 원칙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에 있는 도구와 재료에 의존하고, 누구나 머릿속에 품고 있는 요리에 대한 규칙과 터부와 기억에 따른다.
이런 현상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분자 요리’라는 용어의 창안자 중 한 사람인 프랑스의 과학자 에르베 티스는 우리의 요리가 ‘기술적 정체’를 겪고 있다고 비판한다. 2009년 티스는 이렇게 물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중세처럼 거품기, 불, 냄비로 요리할까? 인류가 태양계 밖으로 탐사선을 보내는 시대에 어째서 이렇게 시대에 뒤진 행동이 존속할까?”
우리는 왜 새로운 요리법으로 바꾸기를 주저할까?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는 것은 늘 위험한 일이었다는 사실이 한 이유이다. 야생에서 처음 본 유혹적인 열매를 더럭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우리가 부엌에서 위험을 꺼리는 것은 과거의 그런 위험에 대한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정 요리법에 대한 애착은 자기 보존의 필요를 넘어선다. 어떤 도구가 오래가는 것은 대개 유용하기 때문이다. 나무 숟가락의 역할을 나무 숟가락보다 더 잘 해내는 도구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요리를 특정한 도구를 써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 때는―얕고 넓은 ㅡ냄비에 발렌시아풍 파에야를 만들든, ‘샌드위치 케이크 틀’이라고 불리는 틀로 빅토리아풍 스펀지 케이크를 만들든―스스로를 자신이 사는 ���간과, 또한 현재와 과거의 가족과 묶는 의식을 치르는 셈이다. 그런 경험은 쉽게 떨치기 힘들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새로운 부엌 기술이 도입되면―토기, 전자 레인지, 개발도상국의 연기 없는 화덕까지도―일각에서는 옛 방식이 더 낫고 안전하다는 반감과 항의가 제기되기 마련이다(어떤 면에서는 그 말이 사실 일 때도 있다).
에르베 티스는 기술 변화에는 국지적 변화와 전역적 변화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부엌 도구의 사소한 국지적 변화는 받아들이기가 쉽다. 티스는 풍선형 거품기에 살을 몇 개 추가하여 달걀을 더 효율적으로 치도록 개선하는 일을 예로 들었다. 새 도구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다른 물체를 연상시킬수록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초기 냉장고가 빅토리아 시대의 육중한 나무 찬장을 닮았던 것, 1860년대 레몬 짜개가 묵직한 철제 고기 다지기 기구처럼 식탁에 죔쇠로 설치하는 형태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1950년대에는 유럽의 ‘물리(Mouli)’ 식품 분쇄기를 본떠 회전 손잡이가 달린 도구들이 숱하게 쏟아졌다. 회전식 치즈 갈이, 회전식 허브 분쇄기가 나왔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사실 그것들은 원조 물리 분쇄기와는 달리 별로 훌륭한 도구가 아니었다. 허브는 짓이겨졌고, 치즈는 회전식 원통 속에 엉겨붙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회전 메커니즘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점이 중요했다. 사람들의 손과 뇌는 회전하는 원통으로 음식을 가공하는 움직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는 훨씬 더 어렵다. 티스가 ‘전역적’ 변화라고 칭한 것이 그런 기술이다. 우리의 선조가 토기로 요리하기로 선택했던 것, 럼퍼드 백작이 개방형 화덕 요리를 나쁜 방식으로 생각하여 버리자고 주장했던 것이 그런 전환이었다. 그런 변화는 우리의 타고난 보수성을 어지럽힌다. 달걀 흰자를 예로 들어보자. 전역적 기술 전환은 기존 거품기에 살을 추가하여 다듬는 대신, 애초에 왜 흰자를 젓는 데에 거품기를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티스가 알고 싶은 것이 그 점이다. “왜 그 대신 압축기와 노즐을 써서 흰자에 공기 방울을 주입하지 않는가?” 또는 왜 우리의 창조성과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참신한 기기를 개발하지 않는가? (303~305쪽)
네이선 미어볼드는 햄버거를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할까? 그는 믿음직한 요리책을 꺼내거나 옛날에 어머니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리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패티를 불판에 올리지도 않는다. 미어볼드는 먼저 자신이 원하는 햄버거를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려본다. ‘궁극의’ 햄버거란 어떤 것인지를, 미어볼드는 고기 속이 장밋빛으로 붉고, 겉은 검게 캐러맬화된 패티를 좋아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궁극의 햄버거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미어볼드에게는 그렇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상태는 통상적인 요리법으로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고기를 불판에 구우면 미어볼드가 좋아하는 수준으로 겉을 지지는 동안 속은 채 익지 않아 파리하다. 그래서 미어볼드는 막대한 부의 일부를 투자하여(그는 예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기술 책임자였다) 실험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낳는 기술을 발견했다.
해답은 보통 가정집 부엌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어도 결코 뻔한 방법은 아니었다. 고기 속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고기가 익자마자 즉시 액화질소에 담가 식혀야 한다. 그 다음 겉을 캐러맬화하기 위해서 기름으로 정확히 1분간 튀긴다. 그 정도면 표면은 충분히 노릇노릇해지지만 열이 속까지 침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미어볼드는 액화 질소나 기름을 쓰기에 앞서 또다른 기술을 적용한다. 수비드(sous-vide)기법이다. 뜨뜻한 물에 고기를 30분 담가 천천히 익히는 것인데, 그러면 고기는 완벽한 미디엄 레어로 연하게 익는다.
모더니스트 요리에서 수비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꼬챙이 로스팅과 같은 존재이다. 달리 말해서, 거의 모든 재료에 두루 쓰는 기본적인 기술이다. ‘수비드’는 프랑스어로 ‘진공에서’라는 뜻이다. 실제로 재료를 진공 포장하기 때문이다. 재료를 튼튼한 비닐 봉지에 담고 진공 밀봉한 뒤, 온도가 정확하게 통제되는 뜨뜻한 수조에 담그고 최대 몇 시간을 넣어둔다(값싼 고기는 48시간이나 담가두어야 연해진다). 수비드 원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쓰인 슬로쿠커(slow cooker)나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벵마리(중탕기)와 조금 비슷하지만, 전체적인 효과는 전혀 다르고 새롭다. 소박한 가정식을 먹고 자란 사람에게 수비드는 요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비닐에 든 음식은 의료 표본이나 포름알데히드에 뜬 뇌처럼 무섭게 느껴진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도 심란하다. 수비드 애호가들은 재료의 향이 그 조용한 봉지 속에 몽땅 갇힌다는 점을 자랑하는데, 그런 만큼 수비드에서는 음식이 익고 있음을 알려주는 보통의 감각 신호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마늘이 지글지글 익으면서 나는 냄새, 리소토의 쌀알이 익으면서 톡톡 튀기는 소리를. (306~307쪽)
수비드는 1960년대에 프랑스와 미국 기술자들이 식품 포장 전문회사 크라이오백을 위해서 개발한 산업용 기술로서, 처음에는 유통기한을 연장하는 기술로 쓰였다. 요즘도 진공 밀폐기법은 그 용도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그 진공 밀폐기법을 은근히 익히는 기법과 결합한다면 유통기한을 연장할 뿐 아니라 더 맛있는 조리법으로도 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1974년에 한 요리사가 발견했다. 프랑스에서 미슐랭 별 3개짜리 식당을 운영하는 피에르 트루아그로는 푸아그라 조리법에 불만이 있었다. 거위나 오리 간을 부풀린 푸아그라는 당시 미슐랭급 식당이라면 누구나 내놓아야 하는 인기 요리였다. 트루아그로의 불만은 푸아그라를 소테로 익히면 원래 무게에서 최대 50퍼센트가 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크라이오백의 자회사인 컬러너리 이노베이션 연구소에 문제를 의뢰했다. 연구소 사람들은 트루아그로에게 푸아그라를 비닐로 여러 겹 진공 포장한 뒤 낮은 온도로 익혀보라고 조언했다. 효과가 있었다. 무게 손실이 5퍼센트로 줄어 트루아그로는 돈을 아낄 수 있었고, 맛도 더 좋았다(적어도 푸아그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팬에서 익히면 녹아 사라지는 지방이 낮은 온도에서 익히면 속에 갇혔기 때문에 맛이 대단히 풍성해졌다.
그로부터 6년 전, 헝가리 출신으로 영국에서 살던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는 독자적인 발견을 하고 있었다. 1968년 쿠르티는 왕립연구소의 전통적인 금요일 밤 강연에서 “부엌의 물리학자”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했다. 쿠르티는 사람들이 부엌에서 과학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좀더 주목하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고 했다. 쿠르티는 청중에게 피하 주사기를 보여준 뒤, 연극적인 몸짓으로 그 속에 담긴 파인애플 즙을 돼지 허릿살에 주입하여 순식간에 연하게 만들었다(파인애플에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브로멜린 효소가 들어 있다). 또 전자 레인지를 써서 ‘뒤집힌 베이크드 알래스카’를 만들었다. 뜨거운 머랭과 살구 퓨레를 차가운 초콜릿 아이스크림으로 감싼 디저트였다. 마지막으로 쿠르티는 정확히 80도에서 8시간 익혀 환상적으로 연해진 양 다릿살을 보여주었다. 엄격하게 통제된 온도에서 은근히 오래 익힌다는 수비드의 발상이 이때 벌써 등장했던 것이다. 요즘 모더니스트 요리사들과 식품 과학자들은 쿠르티를 첨단기술 요리의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1960-1970년대 음식 문화는 피하 주사기와 진공 포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에도 출장 요리 산업은 수비드를 널리 활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끄러운 비밀이었다. 여러분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비드 요리를 먹어본 적 있을 것이다. 출장 요리사가 기업체의 200인분 식사로 코코뱅을 준비해야 한다면, 수비드가 대단히 간편하다. ��식을 일인분씩 봉지에 담아서 수조에서 다 익힌 뒤 필요할 때 ‘간편식’처럼 다시 데우면 되니까. 인건비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요리사가 자랑스럽게 떠벌릴 일은 아니었다. 2009년에도 유명 요리사 고든 램지는 그가 소유한 식당들 중 한 곳에서 ‘봉지에 넣어 끓인’ 음식을 내놓았다는 ‘폭로’ 기사로 곤욕을 치렀다.
수비드는 지난 2-3년 동안 모더니스트 요리가 득세하면서 비로소 공개 석상으로 나왔다. 이제 식당들은 수비드로 수박을 압축하고 셀러리를 ‘급속 피클화’하고 홀란데이즈 소스를 재발명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광고한다. 이 기술을 둘러쌌던 부끄러움은 자긍심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태만의 증거였으나, 이제는 요리사가 재료 고유의 맛을 더 강렬하게 살리기 위해서 깊이 고민했다는 증거이다. 수비드는 모더니스트 부엌의 각종 황당한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모더니스트의 부엌에는 ‘에스푸마’, 즉 거품을 멋지게 올릴 때 쓰는 액화 질소 깡통이 달린 휘핑기가 있고, ‘나노 이멀전’을 만들 때 쓰는 황당하리만치 강력한 유화기도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모더니스트 요리사들은 냉동 건조기, 원심분리기, 파코젯, 사이폰을 휘두른다. 그들은 놀이를 즐기는 아이처럼 끊임없이 묻는다. 왜 안 되지? 뜨거운 불판 대시 영화 30도로 음식을 냉각하는 ‘안티그리들’에 올리면 왜 안되지? 그러면 음식 표면이 너무나 차가워져서 꼭 튀긴 것처럼 바삭해진다.
최첨단 도구를 채택한 전문가의 부엌에서는 요리 방식도 그에 따라 대대적으로 변했다. 그 옛날 에스코피에의 프랑스 요리 세계에는 요리사가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갖가지 기법들의 사전(辭典)이 있었다. 그 사전은 요리사의 기억에 깊게 새겨져 있다. 요리사는 언제 소테펜을 써야 하고 언제 캐서롤 그릇을 써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대조적으로 현대의 새로운 요리사는 요리 기술의 근본을 끊임없이 캐묻는다. 엘불리의 페란 아드리아는 요리 기법에서 그 어떤 측면도 당연시하지 않는다. 아드리아는 1년에 6개월은 식당을 닫고, 그동안 우엉을 자르는 최고의 방법이나 피스타치오를 냉동 건조하는 최고의 방법 따위를 실험으로 철저히 연구한다.
모더니스트 요리 기법들은 물론 의미가 깊다. 그러나 그것이 평범한 가정에 얼마나 응용될 수 있고 응용되어야 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수비드의 자리는 있을 것 같지만, 안티그리들이나 원심분리기가 많은 가정에 자리잡을 것 같지는 않다. 매사를 늘 캐물으면서 사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모더니스트 요리사들조차 항시 그러지는 못한다. 해체에도 한계가 있다. 엘불리에서는 오전 업무 전에 모든 요리사들이 일단 한 컵 마시고 시작하는데, 그 컵에 든 것은 새알처럼 둥글게 가공한 멜론이나 달팽이 거품 요리가 아니다. 커피이다. 고체가 아닌 액체 커피이다. 차갑지 않고 뜨거운 커피로, 좀더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느 주방에서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은 커피이다. 아드리아 밑에서 일했던 무료 견습생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말해보라고 하면, 직원들끼리 토마토 소스나 스파게티나 베샤멜 소스를 뿌린 콜리플라워 같은 평범한 음식을 먹었던 ‘가족’ 식사를 말할 때가 많다. 예술과는 달리 음식은 산산이 해체하여 재발명하기가 썩 쉽지 않다. 모더니스트 요리는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집에서 만든 식사처럼 푸근할 수 있을까?
모더니스트 요리사들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요리에 대해 종종 놀랍도록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어볼드의 『모더니스트 퀴진』 1권에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9번 나오는데, 칭찬하는 맥락인 경우는 한번도 없다. 한번은 내가 미어볼드를 만나 그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들은 일이 있다. 그는 자신이 아홉 살 때 『방화광의 요리책(The Pyromaniacs Cookbook)』이라는 흥미진진한 책을 길잡이로 삼아 생애 최초의 추수감사절 요리를 준비했다면서, 어머니가 그때 부엌에 기꺼이 자기를 들였던 일을 훈훈하게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책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알고 보면 잘못된 ‘상식’을(돼지고기는 바싹 익혀야 한다는 둥) 고수하는 사람들로 거듭 비판당한다. 어머니들의 상식이 합리적인 것으로 밝혀진 사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미어볼드는 과거의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은 “전문가들’과는 달리 “그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요리했다고 말한다. “그저”라니! 가까운 사람들을 먹이는 일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309~313쪽)
인간공학적 도구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도구를 손수 만들어 쓰곤 했던 산업사회 이전 방식과 가까운 것이 많은 듯하다. 그 시절의 나무 숟가락은 사용자를 위해서 특별히 깎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손에 잘 맞았다. 최첨단 기기가 어쩐지 소원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은 기능이 아무리 인상적이더라도 인체와 드잡이를 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공학적 필러와 강판은 부엌 도구에 친근함을 도입하려는 신선한 움직임이다. 음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재료를 준비하는 방식의 문제도 다루겠다는 의지이다. 이런 조리 기구를 설계하는 디자이너들은 모더니스트 요리사들과 마찬가지로 ‘왜 안 되지?’하는 자세로 부엌을 대한다. 차이점은 요리를 재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리를 더 쉽게 만들기 위해서 묻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첨단’ 기술이냐 아니냐보다 인간공학적 기술이냐 아니냐가 현대적인 부엌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구에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최대한 작업을 거들어주는 것, 그리고 각자의 부엌과 몸에 잘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인분을 ��리하든 이인분을 요리하든 그 이상을 요리하든, 각자의 상황에 맞아야 한다. 독신자의 부엌에서는 최근 선보인 끓는 물 수도꼭지(‘쿠커’)가 그런 도구일 수 있다. 기나긴 일과를 마치고 귀가한 사람이 파스타 일인분을 뚝딱 만들어 마음을 달래도록 도와주니까. 대가족에게는 스팀 오븐이 그런 도구일 수 있다. 시간 예약을 해두면 누가 점심을 차릴 순서인지 옥신각신하지 않고도 정해진 시간에 뜨겁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낼 수 있으니까. 최근에 나는 특이한 부엌을 방문했다. 그 집 사람들은 쓰레기와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다는 녹색 원칙에 따라 부엌을 설계하려고 노력했다. 조리대는 전부 재활용품으로 만들었다. 독일제 인덕션 레인지는 초고효율 제품이었다. 환경친화적 팬에서 나오는 음식은 모두 채식 요리였다. 과거의 부엌들과는 달리 이 부엌에서는 아무도 착취당하지 않았다. 요리는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서 했다. 그런데 그 부엌에서 가장 창의적인 부분은 가장 단순한 기술이었다. 그들은 식재료 깡통과 병을 보관할 선반을 제작할 때 목수에게 보통보다 훨씬 더 얕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음식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가장 인간공학적인 도구는 첨단기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일랜드식 조리대는 최근에 우리의 요리 생활에 추가된 물품이다. 그런 조리대의 목적인 요리사가 벽만 바라보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동선을 방해하고 요리사가 가스 레인지 뒤에 가두는 효과를 낼 때가 많다. 내 생각에는 평범한 식탁이 작업대로서 그보다 더 유용하고 식구들과 어울리기도 쉬울 것 같다. 물론 여러분의 생각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도구는 사용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혹은 정당화하지 못한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의 한 친구 분은 얼마 전에 전기 주전자를 포기하셨다. 영국에서 전기 주전자는 반드시 필요한 부엌 기술로 인식되지만, 그분은 툭하면 퓨즈가 타는 실망스러운 제품을 수십 년 동안 무수히 겪은 나머지 이제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셨다. 대신 물이 끓으면 휘파람 소리가 나는 구식 찻주전자를 장만하셨다. 그분은 그 주전자가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왜 여태 중세처럼 거품기와 불과 소스팬을 가지고 요리하느냐고 물었던 에르베 티스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바로 이것이다. 대개의 부엌에서는 대개의 경우 거품기와 불과 소스팬이 임무를 제법 잘 해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더 나은 거품기와 더 나은 불과 더 나은 소스팬일 뿐이다. (330~331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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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파르메산과 체다 치즈, 딱딱한 살라미, 자우어크라우트, 오리 콩피, 소시지, 훈제 연어, 염대구, 기름에 담근 정어리, 건포도, 건자두, 건살구, 라즈베리 잼, 마멀레이드······무수히 많은 이런 맛있는 먹거리는 냉장기법이 좀더 일찍 등장했다면 발명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음식들이 우리 식단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고, 한때 필요에 따라 먹었던 음식을 이미 좋아하게 되었다. 냉장 시대에 베이컨은 즐거움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인 용도가 없는 음식이다. 물론 즐거움은 결코 얕잡을 수 없는 동기이지만 말이다. 사실 신선한 돼지고기를 냉장고에 보관할 수 있다면 훈제 햄을 먹을 필요가 없다. 훈제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은 훈제기법이 고기를 연중 먹을 수 있느냐 1년에 한 번만 먹을 수 있느냐를 좌우하던 과거의 산물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겨울과 봄 내내 단백질 음식이라고는, 운 좋게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지만, 거의 모두 훈제했거나 소금에 절인 것이었다. 고기와 생선이 상하지 않게 막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도축 후에 당장 먹지 않을 고기는 염장으로 보존했다. 큰 나무통에 고깃덩어리를 차곡차곡 쌓고 소금을 켜켜이 덮었다. 그 일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13세기 말 기준으로 고기 5페니(옛날 페니를 말한다)어치를 절이는 데에 소금 2페이가 들었으니, 사람들은 질 좋은 고기만 염장했다. 염장이 가장 잘 되는 고기는 돼지고기였다.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은 햄, 개먼, 베이컨, 솔트포크 외에도돼지의 발, 귀, 볼, 주둥이 등 그야말로 울음소리를 빼고는 몽땅 넣어 절인 ‘사우스(souse)’라는 것을 만들었다. 11월 11일 성 마르틴 축일 만찬용으로 만드는 ‘마르틴 축일 비프’도 비슷한 것으로, 소고기에 소금을 뿌린 뒤 훈제실 지붕에 매달아 충분히 훈제시킨 음식이었다. 옛날 요리사들은 상한 고기 맛을 가리려고 향신료를 듬뿍 썼다는 속설이 오래 돌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향신료는 비싼 재료라서 불량한 음식을 낭비할 수 없었다. 다만 염장한 고기의 깔끄러움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을 뿐이다.
상하기 쉬운 우유도 보존법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응유시키고 발효시켜 요구르트 비슷한 것으로 만들거나 카자흐족의 쿠미스처럼 시큼한 음료로 만들었다. 아니면 증발시켜서 분유로 만들었다(몽골의 발명이다). 서양에서는 염도가 높은 치즈나 버터로 바꾸어 도기 단지에 넣고 주의를 기울여 보관했다. 앨프릭의 『대화』에서 ‘제염업자’는 “내가 당신의 버터와 치즈를 보존해주지 않으면 당신은 그것을 모두 잃을 거요”라고 말한다. 보존을 위해서라기보다 입맛에 맞추려고 간을 한 오늘날의 ‘가염 버터’에 비해서 중세의 버터는 훨씬 더 짰다. 요즘의 가염 버터는 대개 염도가 1-2퍼센트이지만 중세 버터는 그보다 5-10배 더 높았다. 1305년 기록에 따르면, 버터 10파운드를 보존하는 데에 소금 1파운드가 들었다니, 염도가 10퍼센트였던 셈이다. 그런 것을 그냥 먹으면 맛이 얼마나 고약했겠는가. 요리사는 그런 재료를 쓰기 전에 갖은 수를 동원하여 소금기를 씻어내야 했다.
소금은 연약한 생선 살을 보존하는 데도 쓰였다. 스코틀랜드의 특산물인 훈제 청어는 19세기에 발명되었지만, 그전에도 애버딘 지역에서는 스모키, 버키, 버비스 등등의 이름으로 해덕대구를 토탄과 이끼 위에서 진하게 훈제시킨 음식이 있었다. 소금이나 식초에 절인 생선은 유럽의 주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특히 금요일에는. 염장 생선은 고대부터 꾸준히 유통되었다. 처음에는 이집트와 스페인, 나중에는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중세에는 북해와 발트 해의 염장 청어가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염장 청어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청어에는 기름기가 많아 빨리 산패하므로 잡은 지 24시간 내에 절여야 했고, 그보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다. 14세기 청어 상인들은 배 위에서 바로 절였다가 해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포장하는 기법을 개발하여 과정을 간소화했다. 특히 네덜란드인이 기술을 선도했는데, 네덜란드가 유럽 시장을 석권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어선에서 내장을 제거하는 일꾼들은 1시간에 2,000마리씩 절였다고 한다. 일꾼들은 미처 몰랐겠지만 그 속도전에는 추가의 장점이 있었다. 손질을 서두르다 보니 내장을 일부 뱃속에 남겨두었는데, 청어 내장에 든 트립신(tripsin)이라는 화학물질은 보존 처리 속도를 높여주었다. (265~267쪽)
1795년 영국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던 프랑스 정부는 군대를 먹일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식품 보존 신기술을 발견한 사람에게 1만2,000프랑을 주겠다고 내걸었다. 한편 파리 롬바르 거리에서 사탕 가게를 운영하던 아페르도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페르는 다양한 과일을 설탕에 절이는 방법을 알았지만, 같은 효과를 더 ‘자연스럽게’ 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페르가 볼 때 전통적인 보존 기법들은 죄다 문제투성이였다. 건조는 음식 고유의 질감을 앗아갔고, 염장은 ‘떫게’ 했으며, 설탕은 진정한 향미를 가렸다. 아페르는 재료 고유의 속성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보존하는 기법을 찾고자 했다. 그는 샴페인 병에 과일, 채소, 고기 스튜 따위를 담고 뜨거운 물에 담가 가열하는 방법을 실험했고, 나중에 샴페인 병을 주둥이가 더 넓은 유리병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충분히 자신감을 얻은 다음, 프랑스 해군에 표본 몇 개 보냈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해군장관은 아페르의 콩이 “갓 딴 채소의 신선함과 향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럽 통신(Courier de L’Europe)』은 칭찬에 더 후하여 “아페르 씨가 계절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발견했다”라고 보도했다. 아페르는 당당히 상금 1만2,000프랑을 받았다.
아페르의 기법은 단순했다. 음식을 병에 넣고 코르크로 막은 뒤 열탕에서 데우면 그만이었다. 아페르는 그 비법을 1810년에 쓴 책에서 밝혔다. 그가 코르크 마개 병에 보존한 음식은 기기묘묘했다. 아티초크, 송로, 밤, 새끼 자고새, 포도즙, 수영(소럴), 아스파라거스, 살구, ��드커런드, 채소 수프, 신선한 달걀. 그러나 보존 과정의 핵심만큼은 요즘의 참치 캔이나 옥수수 캔 제조방식과 같았다. 즉, 밀봉한 용기를 증기로 가열하는 것이었다.
아페르는 그 발명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는 상금을 받음으로써 특허낼 기회를 포기한 셈이었다. 아페르의 기법을 소개한 책이 나온 지 몇 달 뒤, 영국의 중개인 피터 듀랜드는 아페르의 기법과 수상쩍을 만큼 비슷한 보존기법으로 냉큼 영국 특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유망한 사업 기회를 노리던 기술자 브라이언 동킨에게 그 특허를, 1,000파운드에 팔았다. 동킨은 파트너인 홀, 갬블과 함께 1813년 버몬지에 공장을 차리고, ‘보존실’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곳에서 아페르 기법으로 처리한 식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음식을 용기에 밀폐한 뒤 최장 6시간 열탕에서 가열했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했다. 아페르가 쓴 유리병은 약했기 때문에, 동킨과 홀과 갬블은 그 대신 당근, 송아지 고기, 고기 수프, 삶은 소고기 등등을 주석 도금한 철로 된 통에 담았다. 양철 깡통이 탄생한 것이다.
최초의 캔에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당면 과제는 아페르의 발견과 첫 깡통 따개 사이에 50년의 격차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례는 기술이 때로 두서없이 갈팡질팡 진전한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860년대까지 염장 소고기(군대에서 많이 먹었다), 연어, 복숭아 캔에는 “끌과 망치로 윗면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따라”는 지시문이 딸려 있었다.
최초의 주문 제작 캔 따개는 1855년 설계되었다. 수술 도구와 식기류를 제작하던 로버트 예이츠가 만든 그 물건은 무서운 발톱처럼 생긴 지레에 나무 손잡이가 붙은 형태였다. 지레를 캔 윗면에 박은 다음 힘차게 돌려 깎으면 테두리가 깔쭉깔쭉하게 잘라졌다. 그래서 열리기는 열렸지만, 잘 열리지는 않았다. 캔 따개의 역사는 불만스러운 설계로 점철되어 있다. 미국 남북전쟁 중에는 끝에 날카로운 낫이 달린 ‘워너’ 형태가 널리 쓰였다. 그것은 전쟁터에서는 좋았지만 가장에서는 위험했다. 1868년에는 캔 윗면을 감아올리는 열쇠 모양 따개가 등장했다. 그것은 네모난 정어리 캔을 따는 데는 안성맞춤이었지만 원통형 깡통을 따는 데는 별로였다. 동그란 뚜껑의 일부만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등장한 전기 캔 따개는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사용자가 최소한의 위험과 노력으로 캔을 딸 수 있는 도구는 1980년대에야 등장했다. 요즘 비싸지 않은 가격에 다양한 형태로 판매되는 캔 측면 따개는 현대 부엌의 숨은 영웅이다. 측면 따개는 윗면을 뚫지 않는다. 하나는 회전하고 다른 하나는 톱니 바퀴 두 개를 동시에 움직여 뚜껑을 손상 없이 제거한다. 잘린 모서리도 날카롭지 않다. 이 근사한 도구의 유일한 맹점은 좀더 일찍 발명되지 못한 것이다. 이미 캔 산업은 ���리로 잡아당겨 따는 캔으로 넘어가는 중이어서 이제 캔 따개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캔에 든 음식을 꺼내는 숙제 외에, 캔에 음식을 넣는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캔에 든 음식이 늘 제대로 보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1852년 영국 해군이 납품된 고기 깡통 수천 개를 조사했더니 모두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내용물은 부패한 덩어리’로 바뀌었고, 뚜껑을 열었더니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사람들은 “공기가 깡통에 침투했거나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가 상했다고 추측했다. 파스퇴르 이전에는 공기 없이도 증식하는 미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 미생물을 죽이려면 열탕에서 철저히 소독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의 캔은 용량이 약 900-1,800그램이었다(요즘은 보통 113-450그램). 해군용 깡통은 더 커서 고기를 평균 4.5킬로그램씩 담았다. 그러면 열탕 소독하는 시간도 그에 비례하여 길어져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캔 중앙에 미생물이 남았던 것이다. (270~273쪽)
고대 이집트 이래 사람들은 증발의 원리로 물을 식혔다. 물을 다공성 토기 단지에 담고 단지 겉을 물로 적신다. 그러면 표면의 물이 증발하면서 내부의 물에서 열을 가지고 나간다. 인도에서는 이 기법으로 얼음을 만들었다. 구덩이를 파서 짚을 두르고, 물이 담긴 얕은 토기 단지를 그 속에 넣었다. 기상 조건이 알맞으면―바람이 너무 세지 않으면―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18세기부터 여러 발명가들이 증발의 냉각 효과를 가속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험해보았다. 19세기 초 콘월의 기술자 리처드 트레비식은 압력하에서 팽창하는 공기를 이용하여 물을 얼음으로 바꾸는 기계를 처음 제작했다. 그러나 공기는 좋은 냉매가 되지 못했다. 공기는 열 전도율이 낮은데, 원활한 열 전도야말로 냉각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기술자들은 다양한 기체로 냉매를 시험해보았다. 1862년에는 공기 대신 에테르를 쓴 해리스-지베 증기 압축 제빙기가 선을 보였다. 그것은 ‘15마력 증기 엔진으로 구동되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기계였지만, 기본 원리만큼은 요즘 우리 부엌에 있는 냉장고와 같았다. 기체를―이 경우 에테르를―금속 코일 속에서 압축시켜 액체로 만든 다음 다시 그것을 기체로 팽창시키면 열이 제거되는데, 이것이 바로 냉매 효과이다. 마지막으로 기체를 도로 액화시키면 과정이 처음부터 반복된다. 해리슨-지베 기계는 초기의 폭발 문제를 해결하자 아주 잘 작동했다. 1890년대 대형 얼음 공장들은 증기 엔진을 돌려 이 압축기법을 실행함으로써 깨끗하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얼음을 매일 수백 톤씩 쏟아냈다.
얼음 제조기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발명가들은 기체 흡수식이라는 대안을 고안했는데, 압축식과의 차이는 기체를 압축 코일에 집어넣는 대신 ‘공감적’ 액체에 녹인다는 점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설계를 선보였던 페르디낭 카레의 설계에서 액체는 물이고 냉매는 암모니아였다. 흡수식은 하나��� 아니라 두 물질을 고려해야 했으므로 압축식보다 복잡했다. 그래도 카레의 기계는 인상적이었다. 기계는 쉼 없이 돌았고, 1867년이 되자 시간당 최대 200킬로그램씩 얼음을 생산했다. 그때까지 천연 얼음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없었던 미국 남부에서는 카레의 대형 흡수식 기계를 갖춘 공장들이 속속 세워졌다. 1889년 남부에서는 165개의 공장이 민트 줄렙 칵테일을 식히거나 조지아산 복숭아를 운송하는 데에 쓸 아름답고 투명한 인공 얼음을 생산했다. (285~286쪽)
냉장된 미국과 냉장되지 못한 나머지 나라들 사이에는 깊은 틈이 벌어졌다. 그것은 냉장고와 냉동고 구입에 따르는 지출 문제였을 뿐 아니라 문화의 문제였다. 유럽인은 오랫동안 냉장 보관기술을 적극 거부했다. 프랑스에는 ‘냉장고 공포’를 의미하는 단어[figoriphobie]까지 있었다. 파리의 최대 식품 시장인 레알에서도 손님과 상인이 모두 냉장에 반대했다. 구매자들은 냉장고 때문에 상인들이 너무 큰 힘을 휘두르게 될까봐 걱정했다. 오래된 음식을 신선한 것처럼 속여서 팔 수 있을 테니까. 한편 판매자들은 이 기술이 판매기간을 늘려주므로 반겨야 마땅했는데도, 레알에 처음 냉장고가 도입되었을 때 상인들은 마치 개인적 모욕을 당한 것처럼 반응했다. 냉장고는 맛있는 치즈 고유의 특징을 죽이는 무덤이라는 것이 상인들의 주장이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냉장고에 차게 보관한 브리 치즈는 구식 저장실에서 최고조로 숙성되어 물컹하게 비어져나올 듯한 경이로운 치즈에 비하면 밋밋하기 그지없다.
유럽 대륙 소비자들은 집에서 냉장고를 쓰는 일에도 열광적이지 않았다. 솔직히 그들의 식품 구입 패턴을 보면 냉장고가 필요 없었다. 1890년대 미국 아이스박스 회사들은 유럽 시장 진출을 꾀하느라 각국 영사들에게 아이스박스 수요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영사들이 보내온 정보는 실망스러웠다. 프랑스 남부 대도시에서는 정육업자들이 겨울에는 하루에 한 번,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 도축한다고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 식재료를 구입해서 그날 다 먹었다. 주부들이 그렇게 구입하고 요리하는 데에 만족하는 한, 그리고 판매자들이 손님이 원하는 신선한 식품을 제공할 수 있는 한, 아이스박스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이었다.
영국인도 냉장고 구입을 서두르지 않았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에, 영국을 방문한 미국인은 물건들의 온도가 죄다 엉망인 데에 놀랐다. 방은 춥고 외풍이 심했고, 맥주와 우유는 미지근했고, 버터는 시큼했으며, 치즈는 땀을 흘렸다. 1923년 『집과 정원(House and Garden)』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미�� 가정들이 기본으로 갖춘 냉장고는 영국에서는 충분히 알려지거나 사용되지 않았다.” 1920년대 냉장고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유독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천천히 받아들인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장고에 대한 영국인의 반감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전기 냉장고의 안전성과 일관성이 확인된 뒤에도, 또한 대부분의 가정에 전기가 보급된 뒤에도, 영국인은 냉장고를 쓸데없는 낭비이자 퇴폐적인 물건이라고 보았다. 프리지데어는 영국 시장에 침투하는 과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영국인에게 얼음은 단순한 겨울철의 불편한 물질이었고, 찬 음료는 미국인들의 실수였다. 따라서 강매 전략이 필수적이었다.” 미국적인 과잉의 식성을 꺼리는 태도는 전쟁 중과 전쟁 후의 실제 긴축 상황보다도 앞서 일찌감치 국가적으로 형성된 금욕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 1948년에 영국에서 냉장고를 소유한 가정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결국에는 영국인도 냉기에 대한 반감을 극복했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 영국의 가정은 ‘냉장기기’를 평균 1.4대 소유했다(냉장고든, 차고에 두는 대형 냉동고든). 1950년대 미국 냉장고처럼 화사한 파스텔 색에 큼직하고 투박한 금속 손잡이가 달린 스메그 사의 복고풍 냉장고 ‘FAB’에 대한 욕구는 채워질 줄 모르는 듯하다. 한마디로, 냉장고에 관한 한 영국인은 1990년대 말에야 1959년의 미국인을 따라잡았다. (294~295쪽)
냉장고는 원래 우리의 배를 안전하게 채우도록 돕는 장치였으나, 이제는 만족할 줄 모르고 자꾸만 자기 배를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상자가 되었다. 요즘 우리가 흔히 먹는 음식 중에는 새로 탄생한 냉장고에 넣을 물건이 필요했기 때문에 탄생한 제품들이 많다. 피시스틱이나 냉동 감자 튀김처럼 뻔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구르트를 생각해보자.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서양에서는 요구르트를 거의 먹지 않았다. 인도와 중동에서는 요구르트가 전통 음식이었지만, 그곳에서는 필요할 때 바로 만들어 시원한 곳에 둔 채 발효시키고 응고시켰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런 요구르트의 상업적 잠재력이 전무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영국인이 주로 먹는 유제품 디저트는 우유에 쌀, 사고, 타피오카 따위를 넣어 직접 만든 뒤 미지근한 채로 먹는 우유 푸딩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부터 우유 푸딩의 소비는 매년 급격히 줄었고, 반면에 요구르트는 세계적으로 수십억 달러 산업으로 성장했다. 왜일까? 단순히 입맛이 바뀐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갑자기 미지근한 우유 푸딩에 딸기 잼을 끼얹어 먹던 습관을 버리고 플라스틱 통에 든 차가운 딸기 요구르트를 선호하게 되었는지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개인적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기술 변화의 결과일 때가 많다. 요구르트 제조업체는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새 냉장고를 사면 그 속을 채울 물건이 잔뜩 필요하다는 점을 이용했다. 예쁘고 아담한 요구르트 통은 냉장고 문 선반에 세워두면 보기가 좋았다. 맛은 거의 상관없었다(맛있는 요구르트도 있었지만, 요구르트에 밀려난 전통 푸딩보다 더 밍밍하고 들쩍지근한 제품도 많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1년 내내 얼음을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때로 우리는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297~298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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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은 그것을 둘러싼 문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가장 보편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포크를 주로 쓰는 문화도 있고 젓가락을 주로 쓰는 문화도 있지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문화는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숟가락 형태는 여러 문화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중국에서 완탕을 먹을 때 사용하는 희고 푸른 도자기 숟가락은 러시아에서 찐득한 잼을 먹을 때 썼던 숟가락이나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에 든 수프를 떠서 한 입씩 돌려가며 맛볼 때 썼던 국자 같은 나무 숟가락과는 전혀 다른 문화에 속한다. 기능 면에서 숟가락은 음식을 입으로 나르는 것을 돕는 물체이다. 1960년대에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이 풀잎을 숟가락처럼 이용하여 흰개미를 편하게 쓸어 먹는 것을 목격했다. 먼 옛날 인류는 작대기 끝에 조개껍데기를 묶어서 손으로 먹기에는 묽은 음식을 먹는 데에 썼다. 그 사실은 숟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코클레아레(cochleare)’가 ‘조개껍데기’를 뜻하는 단어에서 왔다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인은 작은 숟가락을 가리키는 ‘코클레아레’로 달걀이나 조개를 떠먹었다. 죽 같은 음식에는 그보다 더 크고 서양배처럼 생긴 ‘리굴라(ligula)’를 썼다.
사람들은 시대별로 좋아했던 음식에 맞추어 다양한 숟가락을 선호했다. 자개로 된 달걀 스푼은 에드워드 시대 사람들이 반숙 달걀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노른자는 은을 변색시키기 때문에 자개나 뼈로 만들었다). 하노버 왕조 시대의 겨자 스푼은 그 알싸한 조미료가 영국인의 식단에 핵심적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 사람들은 로스팅한 골수를 좋아했기 때문에, 은으로 된 특수한 스푼이나 긁어내는 도구를 고안했다. 어떤 스푼은 양끝을 모두 쓸 수 있게 만들어 한쪽은 작은 뼈에 쓰고 반대쪽은 굵은 뼈에 썼다. 로스팅한 뼈를 흰 냅킨으로 우아하게 붙잡은 뒤에 도구를 써서 뼈 속의 부드럽고 기름기 많은 골수를 후볐다. 골수 스푼은 프랑스의 ‘플라토 드 프뤼 드 메르(plateau de fruits de mer)’, 즉 해산물 모듬 접시에 딸려나오던 일련의 복잡한 숟가락, 바늘, 찍개와도 조금 비슷했다.
오늘날 골수 스푼은 어디에도 없다(런던의 요리사 퍼서스 헨더슨이 로스팅한 골수와 파슬리 샐러드를 다시 유행시키고 있으니 어쩌면 도로 나타날지도 모르겠지만). 반면 특수한 도구에서 보편적인 도구로 도약하는 데에 성공한 스푼도 있는데, 그중 최고는 바로 티스푼이다. 티스푼은 영국인이 차에 우유를 넣기 시작한 17세기 후반에 탄생했다. 티스푼은 찻잔 속에서 우유, 설탕, 차를 섞는 도구였다. 식사용 식기류와는 별로도 구비해두는 부자들의 물건이었다. 그런 티스푼이 어떻게 영국의 고상한 티타임 자리에서 전 세계 부엌 서랍으로 퍼졌을까? 언뜻 이상하게 느껴진다. 일본의 다도용품―대나무 차 숟가락, 거품기 등―
은 그렇지 않았고, 영국식 티타임의 다른 장신구, 가량 각설탕 집게나 찻잎 여과기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 물건들은 오후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제대로 된 도자기 찻잔과 찻주전자에 스콘과 크림까지 곁들여 티타임 의식을 즐기는 사람들, 갈수록 수가 줄어드는 소수 집단의 전유물로 남았다. 물론 각설탕 유행이 사라진 탓도 있겠지만, 요즘은 점잖게 각설탕 집게를 쓰는 사람을 만날 일이 참으로 드물다. 그에 비해서 티스푼은 어디에��� 있다.
티스푼이 탄생 직후부터 세계로 퍼진 것은 아니었다. 1741년 프랑스 오를레앙 공작의 물품목록에는 은 도금한 커피 스푼이 44개나 있었지만 티스푼은 하나도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요즘도 계량 단위로 티스푼이 아니라 그보다 좀더 작은 커피 스푼을 쓸 때가 많다(‘퀴이에 아 카페[cuiller à café], 줄여서 cc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 심지어 차를 마시지 않는 지역에서도 티스푼이 우세하다. 미국인은 차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셨는데도 19세기부터 티스푼이 기본 식기로 정착되었고, 그 영향력은 갈수록 더 널리 퍼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티스푼은 주류 문화에 편입되었을까? 빅토리아 시대의 베리 스푼(가장자리가 레이스 모양이었따), 18세기에 숱하게 만들어졌던 작은 은제 소금 스푼(수프 스푼을 닮은 모양도 있었고 아이스크림 스푼을 닮은 모양도 있었다) 등등 다른 특수한 스푼들은 죄다 실패했는데 말이다.
나는 티스푼의 세계적 성공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추측한다. 첫째, 주된 기능으로 보아 티스푼은 사실 차가 아니라 설탕을 뜨는 숟가락이다. 설탕은 차를 마시는 사람만큼이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많이 접한다. 둘째, 티스푼은 작고 간편한 식기류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18세기 식사용 스푼이나 디저트용 스푼보다는 아담하되 프랑스 커피 스푼보다는 컸고 조지 왕조 시대의 소금 스푼처럼 요란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티스푼은 영국의 것보다 좀더 컸지만, 어느 쪽이든 사람의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였다. 티스푼이 용도는 무한하다. 티스푼이 서랍에서 자꾸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그보다 더 잘 사라지는 부엌 용품은 부엌 가위뿐이다). 티스푼은 베이킹파우더나 양념을 잴 때 늘 불려나온다. 요리사는 맛을 보는 용도로도 쓴다. 소스에 살짝 찍어 간을 확인하거나 저녁 식사가 맛있게 되었는지 시식해보는 것이다. 또한 티스푼으로 먹기 편한 음식이 수도 없이 많다. 작은 컵에 담긴 커스터드부터 아보카도까지. 이 대목에서 고백하는데, 10대 시절 약간 괴짜 같고 불안정한 아이였던 나는 몇 년 동안 모든 음식을 티스푼으로만 먹었다. 틀림없이 해소하지 못한 무슨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티스푼으로 아기처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니 극단적인 경우에는 숟가락 하나로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숟가락 사용의 최종 결과―음식을 입에 넣는 것―는 늘 같기 때문에 우리는 숟가락에 최소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우선 숟가락은 일종의 컵이다. 우리는 그 몸서리에 대고 액체를 마신다. 숟가락은 또 삽이 될 수 있다. 고체에 가까운 혼합물을 나르는 용도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밥을 풀 때 쓰는 가래처럼 넓적한 ‘카프기르(kafgeer)’는 숟가락의 삽 기능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중동에는 밥을 풀 때 쓰는 특수한 가래나 주걱 같은 도구가 어디에나 있는데, 그것을 한번 써보면 둥�� 타원형 숟가락보다 밥알을 깨끗이 ���는 데에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31~234쪽)
식기류를 둘러싼 예법은 음식을 손으로 만지는 데에 대한 공포가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 손에 끈적하게 묻거나 소리가 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수프를 조용히 마시라는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듣지만, 일본에서는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소리 내에 후루룩 먹는 것이 예의이다. 서양에서 숟가락으로 마실 때는 옆면에 입술을 대고 빨아들여야지 입에 쑥 집어넣으면 예절에 어긋난다고 했다. 다만 콧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남자는 예외였다. 그들은 숟가락 끄트머리를 대고 마셔도 된다. 1836년에 각설탕을 집게가 아닌 손가락으로 집는 것은 신사가 평판을 흐릴 수도 있는 끔찍한 결례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세련된 척하거나 식사 예절을 꼬치꼬치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도 말아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옳고 그른 포크를 지나치게 따지는 것은 불안의 징후, 심지어 사기꾼의 징후로 간주되었다. 진정한 귀족은 ‘세련되게 거친’ 태도로 포크 대신 손으로 써야 하는 상황이 언���인지를 잘 알았다. 가령 래디시, 크래커, 셀러리, 꼭지를 따지 않은 딸기, 올리브는 손으로 먹어야 했다.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어느 사기꾼이 귀족 행세를 하려다가 들통난 일화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은 그가 올리브를 포크로 먹으려는 것을 보고 거짓말을 간파했다고 한다. 진정한 신사라면 손으로 먹을 테니까.
나이프, 포크, 숟가락 사용법은 예절이라는 더 넓은 문화와 관습에의 순응이라는 더 큰 문명의 일부였다. 틀린 포크를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요컨대,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식기 사용법의 유행은 빠르게 바뀌었고, 한때 관습이었던 행동이 10년 뒤에는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변하곤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유행을 선도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포크로 수프를 먹는 것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물론 금세 ‘바보짓’이라는 쓴소리를 듣고 스푼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음식은 여전히 포크로 먹는 것이 예의 바른 방법이었다. 20세기 중반 영국 상류층에서 ‘포크 오찬’, ‘포크 디너’는 나이프를 전혀 쓰지 않는 뷔페를 뜻했다. 포크가 점잖게 인식된 것은 나이프보다는 덜 폭력적이고, 숟가락보다는 덜 유치하고 덜 지저분하기 때문이었다. 생선, 으깬 감자, 줄기콩, 크림 케이크까지 모든 음식을 포크로 먹어야 했다. 아이스크림과 샐러드, 정어리와 거북 요리에 쓰는 특수한 포크가 만들어졌다. 19세기와 20세기 서양 식사 예절의 기본은 “의심스러우면 포크를 쓰라”였다. 1887년 한 요리책은 “단단한 푸딩에는 스푼을 쓰기도 하지만 포크가 더 보기 좋다”라고 주장했다. (237~238쪽)
그런 포크는 17세기까지도 이상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이탈리아만은 예외였다. 왜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앞서 포크를 채택했을 까?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스타.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마카로니와 베르미첼리가 벌써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수처럼 긴 파스타를 ‘푼테루올로(송곳)’라는 긴 나무 꼬챙이로 먹었다. 그러나 꼬챙이 하나로 미끄러운 파스타 가닥을 감기에 좋다면 두 개는 더 좋을 것이고, 세 개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파스타와 포크는 천생연분 같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긴 리본 같은 탈리아텔레나 페투치네를 매끄러운 털실꾸리처럼 포크로 능숙하게 말아서 먹는 모습은 보기에 즐겁다. 포크가 국수를 먹기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탈리아인은 다른 요리에도 포크를 쓰기 시작했다.
1608년 이전 언젠가 이탈리아를 유람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행가 토머스 코리에이트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풍습을 목격했다. 고기를 써는 동안 “작은 포크”로 붙잡는 풍습이었다. 코리에이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은 “사람들의 손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손으로 음식을 만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광경이 이상했지만, 결국 코리에이트도 습관이 들어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고기를 먹을 때 포크를 썼다. 극작가 벤 존슨, 시인 존 던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요상한 이탈리아 풍습을 ‘명랑한 유머’로 놀리면서 코리에이트를 ‘푸르키페르(furcifer)’라고 불렀다(라틴어로 ‘포크를 든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악당’이라는 뜻도 있다). 엘리자베스 1세도 사탕과자용 포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손가락을 썼다. 포크로 찢는 행동이 천박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진짜 사나이는 키슈를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면, 1610년대에 진짜 사나이는 포크를 쓰지 않았다. 시인 니컬러스 브레턴은 1618년에 “입에 고기를 넣기 위해서 포크를 쓸 필요는 없다”고 선언했다. 20세기가 목전인 1897년에도 영국선원들은 포크를 쓰지 않음으로써 남자다움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착오적 행동이었다. 당시에는 이미 포크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코리에이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1700년 무렵에는 온 유럽ㄹ에 포크가 전파되었다. 청교도들도 썼다. 1659년 올리버 크롬웰의 아들이자 제2대 호국경이었던 리처드 크롬웰은 2파운드 8실링을 지불하고 고기 포크 6개를 샀다. 왕정복고 이후에도 포크는 새로 등장한 트리피드 스푼과 나란히 식탁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했다. 음식으로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 거꾸로 손으로 음식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점잖은 예절이 되었다. 19세기 초까지는 여전히 나이프와 스푼이 포크보다 더 많이 팔렸지만, 어쨌든 포크는 승리했다.
나이프와 포크의 승리는 도자기 접시로 차츰 옮겨간 변화와도 맞물렸다. 도자기 접시는 이전에 쓰던 그릇이나 나무 쟁반보다 보통 더 평평하고 얕았다. 식사를 사발로 먹을 때는 국자처럼 손잡이가 꺾어진 숟가락이 우묵한 데에 담긴 것을 퍼낼 수 있어 좋았다(중세의 무화과 모양 숟가락은 대개 자루가 위로 솟았다). 자루가 수평인 나이프와 포크는 나무 쟁반이나 사발의 굴곡에는 맞지 않았다. 좀더 평평한 표면에서 써야 했다. 여러분도 우묵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나이프와 포크로 먹어보면 대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팔꿈치가 하늘로 치솟고, 도구 사용 능력에 심각한 제약이 따른다. 평평한 접시는 빅토리아 시대에 절정을 구가했던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한 세심한 수신호에도 필수조건이었다. 접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를 소통하는 문자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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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는 나이프와 포크를 다루는 서로 다른 두 기법이 등장했다. 첫 번째는 위대한 에티켓의 스승 에밀리 포스트가 ‘지그재그’ 식사법이라고 명명한 방식이다. 오른손에 나이프를, 왼손에 포크를 쥐고 접시의 음식을 모두 한 입 크기로 썬다. 그러고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포크를 오른 손으로 옮겨서 접시의 음식 조각들을 ‘지그재그’로 찍어서 먹는다. 유럽도 처음에는 이 방식을 썼지만, 나중에는 이것을 미국식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영국인이 더 세련된 방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영국 예절에서는 식사를 마칠 때까지 나이프를 절대로 내려놓지 않는다. 나이프와 포크는 배의 노처럼 리듬감 있게 접시에 밀고 당긴다. 포크가 찌르면 나이프가 자른다. 나이프가 밀면 포크가 받는다. 이 당당한 춤의 목적은 씹기라는 꼴사나운 작업의 속도를 가급적 늦추는 것이다. 미국인과 영국인은 내심 상대의 포크 사용법이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영국인은 자신의 방식이 나이프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점잖다고 생각하고, 미국인은 그냥 자신이 점잖으니까 자신의 방식이 점잖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영국은 공통의 언어로 나뉜 나라일 뿐만 아니라 공통의 식기로 나뉜 나라이다.
토머스 코리에이트가 이탈리아의 고기 포크에 감탄했던 때로부터 400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먹는 음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변했다. 그러나 포크에 대한 의존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이 쓴다. 티스푼이나 도자기 접시와 마찬가지로 포크는 식사 기술로서 확실하게 정착했다. 이따금 햄버거를 쥐고 먹거나 중국 식당에서 젓가락으로 먹을 때처럼 포크를 잠시 버리는 경우는 있지만, 포크는 서양인의 식사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서양인은 금속 살이 음식과 함께 입에 들어오는 감각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포크 사용은 사소한 문제만은 아니면, 요리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ck der politischen Ökonomie)』에서 “요리한 고기를 나이프와 포크로 먹어야만 충족되는 허기는 날고기를 손과 손톱과 치아로 꿀꺽 삼켜 충족시키는 허기와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포크는 어떻게 먹느냐만이 아니라 무엇을 먹느냐도 바꾼다.
그렇다고 해서 포크가 늘 우월한 방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불꽃과 냉장, 거품기와 전자 레인지 등 모든 부엌 기술과 마찬가지로 포크에도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있다. 르네상스의 포크 반대자들은 여러 면에서 옳았다. 나이프와 포크는 로스트 비프를 썰 때는 편하지만 콩이나 쌀을 먹을 때는 도리어 거추장스럽다. 그런 음식은 숟가락이 더 낫다. 서양인이 나이프와 포크로 먹으면서 느끼는 은근한 자만심이 늘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 대단히 호들갑스러운 방식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기술의 효율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인은 나이프와 포크를 매일 쓰기 때문에 그것들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사실 서양의 식사 예절은 젓가락이 한 손으로 너끈히 해내는 일을 두 손으로, 그것도 덜 원활하게 하도록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 (241~245쪽)
젓가락은 서양 요리와는 접근법이 전혀 다른 요리 문화와 병행했다. 젓가락으로는 음식을 자를 수 없고 들 수만 있으므로, 칼질은 부엌에서 전부 이루어졌다. 1845년 중국을 여행했던 미국인 플레처 웹스터는 “모든 음식이 썰려 나온다”라고 기록했다. 요리사가 다 잘라주기 때문에, 중국인은 서양인처럼 어떻게 하면 접시의 음식을 흉하지 않게 썰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인에게는 가령 어떻게 옥수수를 점잖게 뜯어 먹을까 하는 딜레마가 없었다. 그야 중국에서 옥수수가 자라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요리사가 그렇게 큰 음식을 통째 접시에 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무례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젓가락은 서양의 식사 관련 터부에서 핵심이 되는 골치거리를 없애준다. 서양의 터부는 알고 보면 대체로 나이프의 폭력성을 다스리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세상만사에 상징을 읽어내는 사람이었는데, 식탁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바르트가 볼 때 젓가락은 나이프의 대척점이다. 나이프를 쥔 사람은 음식을 먹잇감처럼 다룬다. ‘자르고 뚫고 절단할’ 태세를 갖추고 식탁에 앉는다. 반면 젓가락은 어딘지 ‘모성적인’ 측면이 있다. 숙련자의 손에서 그 작대기들은 음식을 아이처럼 부드럽게 다룬다.
그 도구는 결코 꿰뚫거나 자르거나 가르거나 상처 입히지 않는다. 고르고 뒤집고 옮길 뿐이다. 젓가락은······음식을 훼손하지 않는다. 차근차근 풀거나(채소의 경우) 살짝 찔러 낱낱의 조각으로 나눔으로써(생선, 장어)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균열을 재발견할 뿐이다(이 점에서 나이프보다는 원시적인 손가락에 더 가깝다).
기본적으로 온화한 도구지만, 젓가락으로 무례한 짓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국의 식사는 유럽과 미국의 전통적인 식사보다 한결 격식이 없어 보인다. 상차림은 젓가락 한 쌍, 그리고 숟가락과 공기와 작은 개인용 접시가 전부이다. 20세기 초 중국에서 살았던 영국 여성 플로렌스 코드링턴은 어느날 ‘노부인 친구’를 초대하여 영국식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그녀는 “잔뜩 흥분하여 식탁을 뱅글뱅글 돌면서 이것저것 만져보고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아이고! 웃겨라, 놀라워라!’ 그녀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밥 한 끼 먹자고 이렇게 많은 도구가 필요하다니!”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요리를 하나씩 차례차례 내지만, 중국에서는 모든 요리를 식탁에 차려놓고 모두가 함께 먹는다. 젓가락을 멀리 있는 접시로 뻗어도 무례한 짓이 아니다. 중국 음식 전문 작가인 소얀킷에 따르면, 그래도 “젓가락끼리 부딪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편 중국 요리는 절약의 문화에서 태어났으므로, 식사할 때에도 음식을 낭비하거나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엄격하게 금한다. 특히 밥이 그렇다. 모두 함께 여러 요리를 먹으면 각자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것 같겠지만, 사실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예의이다. 달리 말해, 한 음식에만 너무 자주 욕심스럽게 젓가락을 뻗어서는 안 된다. 밥을 먹을 때는 한 손으로 그릇을 받쳐 입에 대고 다른 손에 쥔 젓가락으로 밥을 푼다. 밥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한다. 영국에서 아이가 음식을 남기면 부모는 아프리카에서 굶는 아이들을 생각하라고 훈계하지만, 중국 아이는―밥을 한 번에 가득 푸지 않고 조금씩 여러 번 덜어 먹는다―쌀을 재배한 농부들이 흘린 땀방울을 생각해보라는 훈계를 듣는다. 낭비하지 말라는 훈계로서는 후자가 좀더 설득력이 있다.
일본은 중국에서 젓가락을 빌려와, 중국보다 늦게 젓가락 문화에 합류했다. 그러나 철저히 젓가락에 의해서 형성된 오늘날의 일본 요리 세계를 본다면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 평민들이 손 대신 젓가락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약 8세기로 비교적 늦었지만, 일단 그렇게 되자 젓가락은 금세 일본 요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일본 젓가락은 중국보다 짧은 편이고(중국은 26센티미터, 일본은 22센티미터쯤 된다), 끝이 납작하지 안고 뾰족하기 때문에 자잘한 조각도 집을 수 있다. 젓가락으로 먹을 수 없거나 그릇에서 들이켤 수 없다면 일본 음식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음식이 세계화됨에 따라 그 법칙에 위배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일본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돈가스, 그리고 급식의 대명사라는 카레가 있다. 돈가스는 보통 비스듬히 썰어 먹기 때문에 나이프가 필요하다. 카레는 젓가락으로 먹을 수 없고 접시에서 바로 마시기에는 너무 걸쭉하므로 숟가락이 필요하다.
그래도 여전히 일본에서는 음식의 종류와 먹는 방법에 젓가락이 큰 영향을 미치고, 젓가락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도 있다. 폭력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젓가락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터부는 기본이고―가령 젓가���으로 남의 얼굴을 가리킨다든지, 음식에 수직으로 푹 꽂는다든지―그 밖에도 미묘한 일탈로 여겨지는 행동들이 있다.
나미다바시(涙箸, 우는 젓가락) : 젓가락 끝에서 국물을 눈물처럼 줄줄 흘리는 행동
마요이바시(迷い箸, 주저하는 젓가락) : 얼른 고르지 못하고 젓가락을 이쪽저쪽 옮기는 행동
요코바시(横箸,, 퍼내는 젓가락) : 젓가락으로 숟가락처럼 퍼내는 행동
사시바시(刺し箸, 뚫는 젓가락) : 젓가락으로 칼처럼 찌르는 행동
네부리바시(ねぶり箸, 핥는 젓가락) : 젓가락에 묻은 음식을 핥는 행동
젓가락 공유에 대한 터부도 있다. 전통 신앙인 신토(神道)에서는 무엇이 되었든 부정하고 불결한 것을 꺼린다. 남의 입에 들어갔던 물건에는 씻으면 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의 일부가 묻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모르는 사람의 젓가락을 쓰는 것은 설령 깨끗하게 씻었더라도 영적으로 불결한 행위이다. 일본 음식�� 연구하며 80권이 넘는 저서를 낸 인류학자 이시게 나오미치 교수는 이런 실험을 해보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쓰는 물건을 남에게 빌려준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그것을 사용한 후에 말끔하게 씻어서 돌려줍니다. 이 경우, 당신이 다시 사용할 때 거부감이 가장 클 것 같은 물건은 무엇입니까?” 학생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물건은 ‘하체용’ 속옷과 젓가락이었다.
와리바시, 즉 싸구려 나무로 만들어서 손님이 직접 반으로 갈라 쓰는 일회용 젓가락의 유행은 그 점에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와리바시가 일회용 폴리스티렌 컵처럼 현대 서구의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와리바시는 일본에서 외식산업이 시작된 18세기부터 존재했다. 손님의 입에 들어가는 젓가락이 불결한 것이 아님을 보장하는 방법은 새 젓가락을 주는 것이었다. 와리바시는 식사 기술의 수용이 간혹 기능보다 문화에 좌우된다는 명제에 대한 좋은 예이다. (246~250쪽)
식사 도구가 없다고 해서 식사 예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먹는 사람들에게는 꼼꼼하게 씻는 일이 식사의 일부이다. 헨리 8세는 손으로 먹던 습관 때문에 역겨움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사실 그는 요즘 우리가 샌드위치를 먹을 때보다 위생과 에티켓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다. 왕의 카버는 식탁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나이프로 긁어서 치웠다. 의전관은 언제든 냅킨을 대령했고, 왕의 옷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떨어주었다. 왕이 식사를 마치면 손에 남은 음식물을 씻을 수 있도록 귀족이 대야를 들고 무릎을 꿇었다. 헨리 8세의 역겨운 버릇을 비웃는 우리 중에서 식사할 때, 그의 절반만큼이라도 청결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손으로 먹는 문화는 청결에 민감해진다. 고대 로마인은 저녁을 먹기 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씻었다. 사막의 아랍인은 손을 모래로 비볐다. 요즘은 아랍인도 포크와 숟가락을 많이 쓰지만, 클라우디아 로던에 따르면 중동 전통 요리를 먹을 때는 보통 손님들이 소파에서 느긋하게 손을 씻는다. “시중드는 사람이 큰 구리 대야와 물병을 가지고 와서 손님들이 손을 씻도록 물을 부어준다(물에서 장미나 오렌지꽃 향이 옅게 날 때도 있다). 동시에 수건을 빙 돌린다.” 9세기에는 한 손님이 손을 씻은 뒤에 머리라도 긁을라치면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그가 다시 손 씻기를 기다렸다가 먹었다. 유럽인이 갑각류를 먹은 뒤에 고상하게 작은 핑거 볼(finger bowl)에 손가락을 담그는 행동은 인도의 전통적인 기준에서는 더러운 일로 비친다. 인도에서는 대야에 손을 담그면 안 된다. 손으로 씻겨나온 더러운 물질로 이미 오염된 물이니까. 그 대신 각자 흐르는 물에 씻어야 한다.
손으로 먹는 사람들은 어떤 손가락을 쓰느냐 하는 문제에도 까다롭다. 왼손을 쓰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용변에 쓰는 손이라 ‘불결’하다) 오른손에서도 써도 되는 손가락이 정해져 있다. 손으로 먹는 문화에서 가장 정중한 방식은 보통 엄지, ���지, 중지만 쓰는 것이다(나이프와 포크 규칙이 다양한 것처럼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공용 ��시에서 음식을 위태롭게 쥐어서는 안 된다. 입에 든 것을 다 씹기도 전에 또 넣는 것은 천한 행동인데, 이것은 나이프와 포크 문화에는 없는 규칙이다.
손으로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제한된다는 생각은 어떨까? 제한되기는 하지만, 포크나 젓가락을 쓸 때보다 더 심하지는 않다. 주된 제약은 온도이다. 손으로 먹는 문화에서는 서양처럼 뜨거운 음식과 식기에 목을 매지 않는다. “접시가 뜨겁고, 뜨겁고, 뜨거운가요?” 1934년에 사교계의 명사였던 엘시 드 울프가 ‘성공적인 만찬’을 위해서 당부했던 말이다. 그러나 손으로 먹을 때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편이 낫다. 실온이나 그보다 약간 더 따뜻한 정도가 좋다. 손은 영국식 로스팅 요리를 먹기에도 이상적인 도구가 아니다. 육즙이 질펀한 고깃덩어리는 분명 도구를 부른다.
손으로 먹는 지역에서는 음식이 그에 맞게 진화했고, 사람들의 손도 도구를 쓸 때는 발휘하지 못하는 힘을 발달시켰다. 17세기 초 ‘터치 황제’의 궁정을 방문했던 유럽 여행가 오타비아노 본은 황제의 괴가 “아주 부드럽고 섬세하게 손질되어 있어서······나이프를 쓸 필요 없이 손가락으로 뼈를 잡아당기면 살점이 쉽게 떨어져나왔다”라고 썼다. 우리도 인도 요리를 먹을 때 포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한 손에는 난을, 다른 손에는 달이 담긴 접시를 들고 난으로 달을 떠먹으면 된다. 손은 단순히 식사 도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더 낫다. 마거릿 비서가 썼듯이, “손으로 먹는 사람들에게는 손이 식기보다 더 깨끗하고 따뜻하고 민첩하게 느껴진다. 손은 조용하고, 촉감과 온도에 예민하고, 우아하다. 물론 제대로 훈련된 경우에.”
요즘도 손으로 먹는 것이 관습인 아랍 사람들은 손에서 입으로 교묘하게 음식을 가져가는 손재간이 발달한다. 그들의 행동에는 포크로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밥을 동그랗게 퍼서 양고기나 가지 요리를 속에 담은 뒤 깔끔하게 뭉쳐 입에 쏙 넣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처럼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몸짓은 어떤 도구로도 더 개선할 수 없을 것이다.
식기는 기능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실용성만 따지자면, 나이프/포크/스푼 삼인조 혹은 젓가락으로는 할 수 있지만 손가락과 그릇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식기는 문화적인 물건이다. 식기에는 음식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음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문화적 견해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현상을 초월하는 물건이 나타났다. 바로 스포크(spork)이다.
‘스포크’라는 단어가 사전에 기록된 것은 1909년이었지만, 첫 특허가 등록된 것은 1970년이었다. 스포크라는 말도 물건도 ‘스푼’과 ‘포크’의 합성이다. 끝에 지우개가 달린 연필처럼, 스포크는 기술을 연구하는 이론가들이 이른바 ‘결합된 도구’라고 부르는 사례이다. 간단히 말해서 두 발명품을 하나로 합쳤다는 뜻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는 조잡한 플라스틱 스포크는 스푼의 바닥과 포크의 살을 결합한 형태이다. (251~254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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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란 아드리아의 엘불리에서 럼과 사탕수수 칵테일을 만드는 데에는 톱으로 질긴 사탕수수를 적당한 크기로 써는 일에 2명, 칼로 껍질을 벗기는 일에 2명, 껍질이 벗겨진 사탕수수를 작은 조각으로 자르는 일에 2명에서 8명이 필요하다. 그들 모두가 봉급을 받지 않는 스타지에르[stagiaires], 즉 견습생이다.
노동 집약적 요리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도 이따금 있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미적인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단순한 요리를 찬양했다. “나는 ���안 노예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준비한 것이 아닌 음식, 며칠 전부터 주문하여 여러 사람의 시중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닌 음식을 좋아한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젊은 요리사들은 그리스인의 주방에 반드시 절구가 있다는 사실에 반기를 들고, 식초와 고수를 절구로 빻는 요리들 대신에 절구 사용을 삼간 단순한 생선 및 고기 요리를 냈다.
목가적인 단순함이 유행한 별난 시기도 가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부잣집 식탁의 표준은 20세기 들어 한참이 지날 때까지도 고도로 정제한 음식이었다. 에드워드 시대의 사람들은 거친 껍질을 잘라낸 빵으로 오이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세 번 거른 콩소메를 마셨다. 성대한 연회 뒤에는 아픈 팔을 부여잡은 하인 부대가 있었다. 손으로 갈고 찧고 젓고 거르는 일은 부엌 노동 중에서도 가장 힘들다. 따라서 노동력을 절감하는 도구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극히 최근까지 거의 없었다는 점, 부엌의 기본 장비가 고대부터 극히 최근까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기나긴 세월 동안 하인들과 노예들―작은 집안에서는 아내와 딸들―은 혁신이 거의 없는 똑같은 절구와 체에 매여 있었다. 부엌 기술의 정체(停滯)는 사람들이 자기 일이 아닐 때는 노동력 절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가혹한 진실을 드러낸다. (194~195쪽)
음식 가공의 기술적 보수성은 하인 문제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과거의 요리책 작가는 제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 사람, 자신은 조금도 힘쓰지 않았으면서도 식탁에 낸 요리의 공을 인정받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분명하면서도 심란한 그 사실을 우리는 곧잘 간과한다. 과거의 좋은 집안 숙녀들은 샐러드에 드레싱을 끼얹거나 설탕 세공처럼 예쁘장한 작업을 하는 데에 섬섬옥수를 쓰기는 했겠지만 힘들게 젓고 빻을 필요는 없었다. 대신해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20세기 프랑스에서 자르고 갈고 반죽하고 거르는 기능이 모두 포함된 푸드 프로세서가 첫선을 보였을 때, 그 기계의 이름은 ‘로보쿠프(Robot-Coupe)’였다. 부엌의 로봇, 인공의 하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짜 하인을 잔뜩 거느리고 있다면, 혹은 가난한 가정이라도 등골이 빠지게 일하는 주부가 있다면, 굳이 로봇을 둘 필요가 없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산업혁명 이후였다. 공장에서 값싼 금속기기가 대량 생산되고 사회의 노동 패턴이 변하면서 비로소 요리사를 편하게 해주는 새로운 기구가 쏟아졌다. (205~206쪽)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믹서는 주부가 어차피 해야 하는 일, 가령 고기를 다지고 달걀을 풀고 케이크 반죽을 젓는 일을 더 쉽게 하도록 도왔다. 푸드 프로세서는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복잡한 요리에 과감히 나서도록 격려했다.
영국의 요리사 마이클 배리가 1983년에 말하기를, 옛날에는 “용감하고 헌신적인 소수의 사람만이 집에서 손수 파테를 만들었다.” “재료를 썰고, 다지고, ���고, 도구를 씨는 일이 너무 피곤했기” 대문이다. 그러나 이제 ��테 제작은 5분이면 끝나는 평범한 작업이 되었다. “프로세서는 삶을 바꾸었다.” 프로세서는 프랑스 오트 퀴진의 까다로운 요리들에서 신비로움을 걷어냈다. 손데이머가 사랑했던 커넬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유럽의 부자들은 그 봉긋한 음식을 몇 입 맛보려고 하인들을 나가떨어지게 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닭가슴살 두 덩이, 소금, 후추, 파르메산 치즈, 크림, 달걀을 프로세서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다.
푸드 프로세서는 나를 포함한 열성적인 중산층 애호가들에게 크나큰 해방감을 안긴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프로세서가 모든 노동을 덜어주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이다. 『파리의 매나지』 속 중세의 주부가 팬케이크를 만들 때, 자기 대신 수고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데에 비해 우리의 하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뿐이다. 우리 눈에는 닭 공장에서 뼈를 바르는 손길들이 보이지 않는다. 목숨을 바친 닭들은 말할 것도 없다. 윙윙거리는 프로세서의 부품을 조립한 노동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산더미 같은 재료와 언제든 분부에 따를 준비가 된 기계만 보인다. 우리는 부엌에 홀로 있으면서 완전한 해방감을 느낀다.
모든 혁명에는 반혁명이 따른다. 푸드 프로세서처럼 특별한 것이 세상에 나왔다면 당연히 역풍이 따르기 마련이다. 영국의 매지믹스는 그 역풍을 일찌감치 겪었다. 매지믹스가 출시된 1973년, 「타임스」에는 그 기계 때문에 미래 세대가 손으로 콩을 까고 반죽을 치대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이라는 글이 실렸다. 심지어 프로세서가 요리의 촉각적 자극을 박탈함으로써 우리 모두 ‘집단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했다.
일단 프로세서가 삶에 들어오자 누구도 다시 그것을 몰아낼 수 없었지만, 불평은 할 수 있었다. 내용은 늘 같았다. 요리의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둥, 로봇이 만든 음식은 손으로 정성스레 만든 음식만큼 맛있을 리가 없다는 둥, 모든 음식이 곤죽으로 바뀌었다는 둥. (219~221쪽)
데이비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유행의 추는 좀더 투박한 프랑스 및 이탈리아 시골풍 요리로 돌아왔다. 재료가 서로 구분되는 요리들이다. 수프와 스튜는 덩어리가 큼직해졌다. 그것은 요리에 프로세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방법이다. 질감이 고운 음식은 과거의 위신을 거의 잃었다. 이제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음식이 높이 평가된다. 누군가 팔을 지쳐가며 만든 음식임을 확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절구도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음식 작가들은 페스토나 타이 커리 페이스트나 스페인 로메스코 소스는 절구로 만들어야 진짜라고 강압적으로 선언했다. 프로세서로 만들면 절대 그만큼 맛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옛날 이탈리아/스페인/아프리카/중동에서 여자들이 둘러앉아 그날 먹을 음식을 내리 몇 시간 찧으면서 함께 ��래를 부르던 생활양식을 동경하는 향수마저 등장했다. 여자들이 하도 지루해서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수 없이 노래라도 불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모양이다. 도시 거주자들이 옛 농민의 생활양식을 흉내내려고 안달인 반면, 농민들은 프로세서를 채택했다. 2000년 캘리포니아의 음식 전문가 말레나 스필러는 원산지에서는 페스토를 어떻게 만드는지 취재하려고 이탈리아 리구리아 지방으로 갔다. 그곳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거대한 막자사발을 자랑스럽게 보여준 뒤, 실제로 페스토를 만들 때는 다른 것을 쓴다고 보여주었다. 푸드 프로세서였다. (222~223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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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 시작일 뿐이다. 부엌에서 가장 정량화하기 어려운 두 요소는 타이밍과 열이다.
“왼손을 좍 펼치세요.” 캐나다 출신 요리사 존 카디외가 내게 말했다. 남들이 자기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데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런던의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인 굿맨 시티의 어두침침한 식탁에 앉아 있다. 카디외는 그곳 수석 주방장이다. 우리는 스테이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제 오른손 집게 손가락을 듭니다.” 카디외는 내게 오른손가락으로 왼손바닥의 엄지 아래 도통함 부분을 누르는 법을 알려준다. “레어 스테이크는 그런 느낌입니다.” 내 손가락이 푹신한 살점에 푹 꽂힌다. 과연 반발력 없는 날고기를 누른 느낌이다. “다음에는 왼손 검지와 엄지를 붙이고 다시 눌러보세요. 그게 미디엄 레어입니다. 가운뎃손가락까지 붙이면 미디엄, 약지까지 붙이면 미디엄 웰던,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까지 붙이면 웰던입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엄지 아래 살점이 꼭 팬에서 익어가는 스테이크처럼 단단해지는 것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시원하게 머리를 민 30대의 카디외는 고급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7면 넘게 일한 요리사이다. 그가 그런 나를 보고 뒤로 기대며 씩 웃는다. “옛날 주방장들의 수법이죠.”
그 레스토랑에는 최첨단 숯 오븐이 있고(하나에 1만3,000파운드짜리로 두 개가 있다), 서로 다른 굽기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주문에 대처하기 위해서 수많은 디지털 타이머가 있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고기 온도계가 있다. 카디외는 신입 요리사를 (그전에 받은 훈련은 별도로 하고) 최소 2주일 교육한 뒤에야 스테이크를 굽게 한다. 요리사들은 고기 부위와 굽기 정도마다 다른 온도를 정확하게 외워야 한다. 그러나 카디외 자신은 다른 기준을 쓴다. “나는 온도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낭만주의자거든요.” 그는 스테이크를 수천 장 구워보았기 때문에, 이제 눈으로 보고 만져보면 다 익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지만, 카디외가 자신의 우월한 지식을 수습들에게 전달할 때는 문제가 된다. 그때는 그도 온도계 혐오를 극복한다. 자신은 측정기구가 필요하지 않아도 부주방장들에게는 달인의 본능적 직감이 발달할 때까지 도구를 목발처럼 활용하라고 권한다. 중세에는 주방장이 요리 기술을 전수하기가 훨씬 더 난감했을 것이다. 카디외처럼 실용적인 요리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이상 의지할 디지털 탐침이나 타이머는 없었으니까. 요리가 다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그냥 안다. 그러나 ‘그냥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원리를 설명할 때는 몸에 체득된 지식이 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대신 번역어처럼 기능하는 갖가지 암호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행히 중세에는 주방장이 수습에게 세밀한 측정의 기준점을 전수하는 기간이 카디외의 2주일보다 훨씬 더 길었다. 대부분의 수습은 어려서부터 일을 시작한 터라 다년간 타이밍의 비법을 지켜보고 터득했을 테니까.
요리사는 어떤 방법으로든ㄴ 늘 시간을 잴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부엌 벽에서 조용히 똑딱거리는 시계는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실은 핵심적인 부엌 기술이다. 시계가 처음 부엌에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중세와 근대 초기에는 확실히 시계가 표준이 아니었다. 시간을 몇 분 몇 초가 아니라 기도로 표현한 레시피가 많았기 때문이다. 중세 프랑스의 호두 절임 레시피를 보면 ‘미제레레(‘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를 한 번 읊을 동안 호두를 끓이라고 말한다. 약 2분이다. 가장 짧은 단위는, 편차가 있지만, 대충 20초인 ‘아베 마리아’였다. 그런 레시피는 물론 중세 프랑스 사회가 속속들이 종교로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지만, 시계가 귀하고 비쌌던 시절에는 기도로 시간을 재는 방법이 대단히 실용적인 의지처이기도 했다. 호두알만 한 버터와 마찬가지로, 그런 시간 단위는 공통의 지식에 의존했다. 사람들은 성당에서 기도를 소리 내에 읊었기 때문에 기도를 어떤 빠르기로 암송해야 하는지 누구나 잘 알았다. “주기도문을 세번 외울 동안 소스를 끓이면서 저어라”,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울 동안 육수를 졸여라”라고 하면 다들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것은 탈속적이기는커녕 여느 세속적인 표현보다 오히려 더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가령 “2리그를 걷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건더기가 가라앉도록 내버려두라”는 표현과 비교해보라. 기도를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쓰는 방법은 요리사들이 식사를 제대로 익히되 태우지 않기 위해서 심오한 창의성과 주의력을 발휘해야 했던 오랜 세월의 산물이었다.
시간은 기도로 잰다면, 온도는 통증으로 쟀다. 오븐의 열을 확인하려면 손을 안에 넣었다. 요즘도 유럽 시간의 제빵사들은 그렇게 한다. 오븐에 넣은 손에 느껴지는 아픔으로 빵 굽기에 적당할 만큼 달궈졌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 적당한 온도란 맹렬하게 뜨거운 것을 말한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 19세기 제과업자들이 많이 썼던 종이 시험법이었다. 이때 관건은 불을 한껏 지펴 열기가 절정에 오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븐이 서서히 식으면서 온화한 열기가 미세하게 단계를 달리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케이트와 패스트리는 버터와 설탕 함량이 높아서 빵보다 훨씬 더 쉽게 불이 붙기 때문이다. 온도는 휜 종잇조각을 오븐 바닥에 놓았을 때 종이가 띠는 색깔로 파악했다. 종이 한 조각을 오븐에 넣고 문을 닫는다. 종이에 불이 붙으면 너무 뜨거운 것이다. 10분 뒤에 또 한 조각 넣는다. 타지 않고 까맣게 그을리면 그래도 여전히 너무 뜨거운 것이다. 또 10분 뒤에 세 번째 조각을 넣는다. 불붙지 않고 갈색으로 그을리면, 이제 고온에 굽는 작은 패스트리에 글레이즈를 입히기에 알맞은 시점이었다. 그것을 “진갈색 종이 열”이라고 불렀다.
1867년부터 파리 자키클럽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쥘 구페는 다른 종류의 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설명했다. 진갈색 종이 열보다 몇 ��� 아래인 “연갈색 종이 열은 볼로방, 뜨거운 파이 껍질, 텡발 껍질 등을 굽기에 적합하다.” 그 아래인 “진노란 종이 열’은 큰 패스트리를 굽기에 좋은 뜨뜻한 온도이다. 마지막은 미지근한 “연노란 종이 열”로, 구페에 따르면 “망케, 제누아즈, 머랭에 적합한” 온도이다. 변형 형태로 밀가루 시험법도 있었다. 원리는 같지만 종이 대신 밀가루를 한 줌 오븐에 뿌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40초를 센다. 밀가루가 서서히 갈색으로 익는다면 빵을 굽기에 알맞은 시점이었다.
이런 우왕좌왕은 20세기에 온도계가 내장된 오븐이 등장하면서 일거에 사라졌다. (174~177쪽)
모더니스트 주방이 측정하는 성질은 무게와 온도만이 아니다. 첨단기술로 무장한 그 요리사들은 미식의 신천지를 지도로 작성하려는 탐험가와 같다. 그들은 고추의 맵기(스코빌 지수로 측정한다)에서 자신들이 선호하는 초저온 냉동실의 냉기까지 모든 것을 정량화하고 싶어한다. 과일 퓨레의 맛을 알고 싶으면 혀가 아니라 전자식 pH 측정기를 꺼내서 액체의 산성이나 알칼리성 지수를 즉시 정확하게 잰다. 소르베 믹스의 당분 함량을 잴 때는 빛이 물질을 통과하며 굴절되는 정도가 달라지는데, 그 정도로 시럽의 당도를 알 수 있다(달수록 밀도가 높다). 이것은 18세기부터 양조가와 아이스크림 제조가가 썼던 구식 당도계를 발전시킨 기술이다. 구식 당도계는 부력의 원리를 이용해서 당분 함량을 쟀다(액체에 담근 유리 공이 높이 뜰수록 액체가 더 달다). 그전에는 벌꿀술 제조가가 쓰는 방법이 있었다. 달걀을 껍질째 액체에 빠뜨려서 둥둥 뜨면 충분히 달다고 판단했다.
오늘날의 요리사들은 과거에는 누구도 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까지 잰다. 가령 완벽한 감자칩을 만들 때 필요한 감자의 수분 함량을. 영국 버크셔에서 레스토랑 팻덕을 운영하는 선구적 요리사 헤스턴 블루멘탈은 자신의 장기인 세 번 익힌 감자칩 요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한 번은 물로, 다음에는 수비드 방식으로, 마지막은 땅콩 기름으로 튀긴다. 나도 딱 한 번 먹어보았는데 정말로 탁월하게 바삭했다). 블루멘탈은 ‘일관되게 바삭한’ 완벽한 감자칩은 건물질(乾物質) 함량이 약 22.5퍼센트인 감자로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는 감자를 눈으로만 보고서는 수분 함량을 알아낼 손쉬운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해결책은 생감자 약간을 표본 삼아 튀기면서 동시에 무게를 재서 수분 함량을 알아보는 특수한 건물질 저울이다. 요리된 감자와 생감자의 무게 차이에서 물이 얼마나 증발샜는지 계산하는 것이다. (181~182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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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계량은 늘 이런 식이다. 훌륭한 요리는 정밀한 화학 작업이다. 정말 훌륭한 식사와 그저 그런 식사의 차이는 불과 30초와 소금 4분의 1 티스푼에 달렸을 수도 있다. 레시피는 요리를 재현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재현 가능성은 어떤 실험을 다른 독립된 연구자가 정확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레시피에서 추구하는 것도 그런 성질이다. 당신의 애플파이 레시피는 내가 내 부엌에서 따라했을 때 이론적으로 정확히 같은 맛이 나야 한다. 그러나 요리사의 작업 환경에는 과학자가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외래 변수들이 존재한다. 불안정한 오븐 온도, 교체된 재료, 손님들의 입맛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요리사가 계량을 위한 계량에 골몰하면 계량컵 때문에 요리를 놓칠 수 있다. 정확한 공식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 요리사에게든 최고의 계량법은 결국 개인적 판단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계량 도구를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 이상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는 정확성이다. 계량 결과가 정해진 값에 상응하느냐 하는 것을 ���한다. 내가 우유 1리터를 잴 때 쓰는 병이 정말로 1리터인지? 둘째는 정밀도이다. 이것은 계량 결과의 세밀도를 말한다. 우유를 0.5밀리리터 단위로 잴 수 있는지? 셋째는 일관성이다(과학자는 재현 가능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똑같은 양의 우유를 몇 번이고 똑같이 잴 수 있는지? 넷째는 환산 가능성이다. 어떤 계량이 더 광범위한 도량형 체계에 얼마나 잘 맞아드는가, 그리고 우유를 쟀던 도구나 단위로 다른 물질도 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기준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바로 편의성(사용자 친화성)이다. 별다른 의식이나 자원이나 기술 없이도 우유 1리터를 잴 수 있는지? 마지막 기준으로만 따지자면 최고의 계량 도구는 평범한 파이렉스 계량컵이다. 1915년 최초의 특허를 받은 내열 유리로 만들어진 파이렉스 컵은 미터법과 영국식 도량형을 둘 다 선명한 눈금으로 보여주고, 내용물을 따를 수 있는 주둥이가 있으며, 냉동실과 전자제인지에 넣을 수 있고, 부엌 바닥이 아주 딱딱하지만 않다면 떨어뜨려도 튕겨오르는 소중한 능력이 있다.
모든 요리에는 계량이 수반된다. 설령 오감으로 본능적으로 하는 계산일 뿐이라도. 눈은 우리에게 양파가 충분히 투명해졌다고 알려주고, 귀는 팝콘이 다 튀겨졌다고 알려주며, 코는 토스트가 탈 참이라고 알려준다. 요리사는 그런 계산에 의지하여 부피와 시간을, 온도와 무게를 끊임없이 추측하고 결정한다. 모든 요리사는 그런 변수들을 조절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더 나은 기술로 더 정확하게 계량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더 맛있는 요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엌에서 공식에만 집착하는 것은 비생산적일 수 있다. 지금껏 어떤 기술도 민감한 코, 예리한 눈, 석면 방열 장갑같은 손, 뜨거운 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훌륭한 요리사의 계량 능력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런 요리사의 오감은 어떤 인위적 더구보다도 확실하게 음식을 읽어낸다. (153~155쪽)
“일 파인트는 세상 어디에서나 일 파운드”라는 오래된 말이 있다. 한때는 정말 그랬다. 앵글로색슨 시절 잉글랜드는 당시 수도였던 윈체스터의 이름을 따서 ‘윈체스터 도량형’을 정했다. 그것은 음식의 무게와 부피 사이의 등가(等價)를 규정하는 체계였다. 부피 단위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도량형을 만들 때 무게 단위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분명 가장 명확한 방법이었다.
계량컵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용기의 용적을 정확히 알아내는 일이 얼마나 까다로울지 상상해보자. 주어진 컵에 물이 얼마나 담기는지 어떻게 알까? 물을 다른 컵에 부어 두 높이를 비교하면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컵의 부피는 또 어떻게 알까? 금세 악몽 같은 과제가 된다. 이때 무게를 아는 어느 물질의 부피를 동원하면, 과제가 한결 쉬워진다. ‘윈체스터 부셸(bushel)’은 밀 64파운드의 부피로 정의되었다(밀 낟알은 밀가루보다 밀도 편차가 적기 때문에 양이 비교적 일정했다). 1부셸은 4펙(peck), 1펙은 2갤런(gallon), 1갤런은 4쿼트(quart), 1쿼트는 2파인트(pint)였다. ���추리면 만족스러운 사실이 도출된다. 1부셸은 (밀) 64파운드와 같고 (물) 64파인트와도 같다. 정말로 1파인트는 1파운드였다. 깔끔하지 않은가.
만일 윈체스터 도량형이 유일한 부피 단위였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영국에서는 서로 다른 물질에 적용되는 서로 다른 갤런이 경쟁적으로 쓰였다. 윈체스터 갤런(옥수수 갤런이라고도 했다)뿐 아니라 포도주 갤런과 에일 갤런이 있었는데 양이 다 달랐다. 사람들이 보통 포도주보다 에일을 더 많이 마신다는 사실을 반영하듯이, 에일 갤런이 포도주 갤런보다 컸다(각각 약 4.62리터와 3.79리터). 우리는 측정을 논할 때 이런 식의 흐트러진 논리에 빠져들기 쉽다. 영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의 록 스타 나이절이 떠오르는데, 그는 음악 소리를 더 키우려면 눈금이 10이 아니라 11까지 올라가는 앰프를 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표준 도량형이 없는 것은 정확한 몫을 받기를 원하는 구매자에게 골칫거리였지만(에일 1파인트가 동네마다 달랐으니까), 국가에도 문제였다. 단위는 물품을 매기는 세금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215년 대헌장은 “온 영토에 하나의 포도주 단위, 하나의 에일 단위, 하나의 옥수수 단위가 있게 하라”고 선언함으로써 통일성 부재를 해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고, 경쟁하는 단위들이 계속 활개를 쳤다. 1066년부터 17세기 말까지 갤런은 12종이 넘었다. 고체용도 있었고 액체용도 있었다.
18세기 말, 중세 도량형의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1790년대부터 미터법이 정착되었다. 미터는 북극점과 남극점을 잇는 가상의 선, 즉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한 과학자들의 탐험 결과에 바탕을 둔 단위였다. 1미터는 자오선의 100만 분의 1로 정의되었다. 실제로는 사소한 계산 실수 때문에 그보다 약간 더 작았지만, 어쨌든 원칙은 세워졌고, 이제 프랑스인은 모든 것을 십 단위로 측정할 생각이었다. 1795년 제르미날 18일의 법은 리터, 그램, 미터라는 새로운 단위를 공포했다. 뒤죽박죽 섞인 케케묵은 표준들을 소탕하는 작업은 프랑스의 현대성을, 즉 합리성과 과학성과 상업성을 과시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혁명가들은 도로 체계부터 버터 덩어리까지 모든 것을 완벽한 십 단위로 세분했다. 심지어 일주일을 열흘로 잡은 ‘데카드(décade)’도 실험했다. 새 측정 체계 덕분에 생활은 더 논리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프랑스인은 그램으로 잰 빵을 먹었고, 밀리리터로 잰 커피를 마셨고, 십진법에 기반한 프랑(franc)과 수(sou) 통화로 계산을 치렀다.
미국인과 영국인도 나름대로 개혁을 실시했지만 어느 나라도 혁명적인 프랑스만큼 밀어붙일 마음은 없었다. 1790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에게 도량형 개혁안을 작성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미국은 벌써 영국의 크라운 동전, 파운드, 실링, 페니를 떨쳐버리고 십진법 주화를 채택한 뒤였다. 그러나 의회는 제퍼슨이 제안한 두 개혁안 중 어느 것으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수십 년을 더 허비했다.
한편 영국은 1824년에 행동에 나섰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쫓아 완벽한 미터법을 추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불과 얼마 전에 전쟁을 마친 적국이었으니까. 영국의 목표는 그저 원활한 통상을 위해서 여러 표준들이 공존하는 암흑기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뿐이었다. 1824년 의회는 건량이든 액량이든 갤런이라는 하나의 단위를 쓰자고 투표로 정했다. 새 영국식 갤런은 “정해진 온도와 압력에서 물 10파운드가 차지하는 부피”로 정의되었다. 그 양은 4.55리터로 옛 에일 갤런과 비슷했다. 새 갤런을 확정하자 그에 따라 파인트, 쿼트, 부셰을 조정하는 일은 쉬웠다. 속담은 이렇게 바뀌었다.
일 파인트는 세상 어디에서나 일 파운드.
그러나 영국은 예외라
물 일 파인트는 일과 사분의 일 파운드
여기에서 영국은 영연방이라고 읽으면 안된다. 영국인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곳마다 자신만만하게 새 도량형을 보급했다. 식민지 캐나다의 메이플 시럽 1파인트는 식민지 인도의 위스키 1파인트와 부피가 같았다.
그래서 측정의 혼란이 해소되었을까? 전혀 아니다. 미국 의회는 1836년 마침내 미국 표준 단위를 확정했다. 그런데 영국과는 반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새 영국식 갤런을 도입하는 대신에 옛 체계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두 갤런을 고수하기로 한 것이다. 건량에는 윈체스터(혹은 옥수수) 갤런을, 액량에는 퀸앤(혹은 포도주) 갤런을 쓰는 방식이었다. 미국이 영국과 다른 표준을 원했던 것은 놀랍지 않지만, 영국으로부터의 자유를 독자적인 현대적 단위로 표현하지 않고 케케묵은 옛 영국 단위로 표현했던 점은 놀랍다. 미국은 인류 최초로 사람을 달에 보낼 때도 18세기 런던의 파인트와 부셸로 계산했던 것이다. 오늘날은 구글 검색의 시대인지라 주부들이 『요리의 즐거움(The Joy of Cooking)』을 뒤적이기보다 온라인에서 레시피를 검색할 때가 많지만, 미국 요리 웹사이트의 레시피들도 전통적인 컵 단위를 쓴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의 부엌은 200년 가까이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1969년 영국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미터법 국가에 합류하면서 사태는 더 나빠졌다(아직도 많은 영국 가정은 영국식 도량형을 선호하지만). 미국은 세계에서 프랑스 미터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은 세 나라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둘은 라이베리아와 미얀마이다. 미국인은 재료의 양을 그램으로 말하는 유럽 방식이 어쩐지 냉정하고 심지어 비인간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는 미국의 컵 계량법이 혼란 그 자체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컵을 미터법에 따라 250밀리리터로 정했지만, 영국에서는 영국식 파인트의 절반인 184밀리리터로 해석하곤 한다. 캐나다는 영국식 액량 8온스에 해당하는 227밀리리터 컵을 쓴다. 진짜 미국 컵은 어느 것과도 다르며, 미국 파인트의 절반, 즉 236.59밀리리터로 엄밀하게 정의된다. (159~163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오타 : 프랑스혁명 당시 1m의 정의는 100만분의 1이 아니라 1000만분의 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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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는 그렇게까지 엄격한 구분이 없었다. 아랍어로 ‘빵’을 뜻하는 단어는 ‘후브스(khubz)’이고 여기에서 ‘빵을 굽다’ 혹은 ‘후브스를 만들다’라는 뜻이 ‘하바자(khabaza)’가 나왔다. 그러나 ‘하바자’는 그냥 ‘굽다’ 혹은 ‘로스팅하다’라는 뜻도 있다. 영국인이 서로 다른 세 요리법으로 생각하는 것을 한 동사가 포괄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기법을 ‘탄두르(tandoor)’라는 점토 오븐에서 수행한다.
점토로 된 기본적인 빵 굽는 오븐의 역사는 오늘날 파키스탄,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 해당하는 인더스 계곡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적어도 기원전 3000년까지 올라간다. 요즘도 아프리카 시골 지역에서 쓰이는 전통적인 원통 모양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원통 바닥에 불을 피우고, 위에 난 구멍으로 반죽을 넣어서 오븐 옆면에 찰싹 붙인다. 몇 분 뒤 꺼내면 납작빵이 되어 있다. 이렇게 화분을 뒤집은 것처럼 생긴 점토 오븐을 이라크에서는 ‘티나루’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탄누르’나 ‘탄두르’라고 부른다. 요즘도 중동,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에서 쓰는 기술이다.
탄두르는 5,000년 넘게 개량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목적은 같다. 강렬하고 건조하여 빵 굽기에 좋은 열을 제공하는 것이다. 탄두르가 있으면 가난한 집이라도 빵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 마을 아마르나에서 기원전 135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계층의 집들이 발굴되었는데, 그중 절반이 원통형 점토 오븐의 흔적이 있었다. 아주 작은 집에도 말이다. 유럽에서는 전문 제빵사가 굽는 빵이 진짜 빵이라는 믿음이 지속된 데에 비해서, 중세 이라크에서는 집에서 만든 탄두르 빵을 선호했다. 중세 바그다드의 시장을 조사했던 사람의 기록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시장에서 구운 빵을 사 먹지 않으려고 한다”라고 쓰여 있다.
가정에서도 탄두르는 불만 있을 때와는 달리 여러 요리법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점토 오븐은 싸고 휴대 가능하면서도 약간의 열 통제력을 제공했다. 바닥의 ‘눈’을 열고 닫으면 온도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었다. 둥글고 참기름을 바른 이라크의 ‘물빵’처럼 특정 종류의 빵들은 비교적 온건한 열로 구웠지만, 필요할 때면 화로처럼 뜨겁게 달굴 수 있었다. 탄두르 바닥에서 바로 나무나 숯을 태우는 데다가 음식이 익는 동안 내내 불을 지피기 때문에, 현대 탄두르의 초고 온도는 480도까지 올라간다(대개의 가정용 전기 오븐은 최고 온도가 220도이다). 이처럼 타는 듯한 열기 때문에 탄두르는 강력하고 다재다능한 도구가 된다.
탄두르는 빵 굽는 데이만 쓰이지 않는다. 중동과 동아시아 요리에 베이킹/로스팅이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때문이다. 탄두르는 빵, 쿠키, 크래커를 굽는 것은 물론이고 스튜나 캐서롤을 끓일 수 있고, 고기를 로스팅할 수 있다. 요즘은 탄두르가 탄두리 치킨을 만드는 도구로 더 유명하지 싶다. 닭을 요구르트와 붉은 향신료에 쟀다가 굽는 요리이다. 10세기 바그다드에서 탄두르는 ‘지방 많은 새끼 양이나 새끼 염소를 통째, 주로 속을 채워서’ 로스팅하거나 ‘큼직한 고깃덩이, 통통한 가금류와 생선’을 로스팅하는 데에 쓰였다. 불에 납작한 벽돌 타일을 얹고 그 위에 음식을 놓기도 했고, 꼬챙이에 음식을 꿰어 탄두르에 넣은 뒤 육즙이 돌 때까지 익히기도 했다. 탄두르를 보자면 오븐으로 고기를 ‘로스팅’할 수 없다는 말은 무의미했다. 그런데 탄두르의 열은 서양의 빵 오븐과는 다른 방식으로 음식에 작용한다.
요리에 쓰이는 열은 세 종류가 있다. 모든 요리는 열이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흐른다는 열역할 제2법칙을 준수한다. 그러나 그렇게 에너지 전달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첫 번째 방식은 복사열(輻射熱)이다. 이탈리아풍 프리타타 오믈렛을 그릴에 넣었을 때, 순식간에 부풀며 노���노릇해지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그릴은 오믈렛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데도 음식을 익힌다. 그것이 바로 태양의 햇살과 비슷한 복사열이다. 전자파와 마찬가지로 복사 에너지는 접촉 없이 전달된다. 시뻘겋게 타는 불은 불꽃에서도 잉걸불에서도 복사열을 많이 공급한다. 이반 데이가 부엌에서 불을 쑤셨을 때, 열기가 참을 만한 수준에서 못 견딜 만한 수준으로 뛰는 것은 복사열의 양이 껑충 늘었다는 뜻이다. 덕분에 고깃덩이를 지글지글 그을릴 만한 열이 나온다.
두 번째 방식은 전도(傳導)이다. 복사와 달리 전도는 접촉을 통해서 물질에서 물질로 열을 전달한다. 금속 같은 물질은 대단히 좋은 전도체이고, 점토나 벽돌이나 나무 같은 물질은 나쁜 전도체이다. 물질이 열을 받으면 그 속의 원자들이 빠르게 진동하는데, 전도는 그 진동이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달되는 현상이다. 금속 팬에서 스테이크로, 소스팬 손잡이에서 연약한 사람의 손으로.
요리에 쓰이는 열 전달의 세 번째 방식은 대류(對流)이다. 대류는 공기, 물, 육수, 기름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유체 속 분자들이 열을 확산시키는 현상이다. 액체나 기체에서 뜨거운 부분은 차가운 부분보다 밀도가 낮다. 수증기와 물을 떠올려보라. 이때 뜨거운 유체가 차가운 유체에 서서히 에너지를 전달하여 결국 다 같은 온도가 된다. 냄비에서 보글거리는 죽, 예열한 오븐 속 공기를 떠올려보라.
어떤 조리법이든 세 종류의 열을 조합해서 이용하지만, 보통은 그중 한두 가지가 압도한다. 그런데 탄두르는 세 종류의 열 전달을 하나의 도구에 결합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밑에서 타는 불은 엄청난 복사열을 퍼붓고, 옆면의 점토 벽이 간직한 열기에서도 복사열이 조금 나온다. 벽에 붙은 빵이나 꼬챙이에 꿴 고기는 벽의 점토나 꼬챙이의 금속으로부터 전도열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오븐 속을 순환하는 뜨거운 공기가 대류열을 낸다. 그렇게 강렬하고 강력한 열로는 익히지 못할 것이 거의 없다.
서양의 오븐은 일반적으로 벽돌 상자였다. 그런 오븐에서는 보통 약 80퍼센트는 대류열이고 20퍼센트는 복사열이다. 탄두르처럼 강렬한 열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맹렬하게 뜨거웠다가 차츰 차가워진다. 음식은 불길이 이미 수그러든 뒤에 넣었다. 오랜 세월 진화한 서양의 요리 스타일은 이렇게 차츰 식는 열원을 고려하여, 온도의 매 단계마다 열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레퍼토리를 짰다. 요리사는 음식을 순차적으로 익혔다. 오븐이 가장 뜨거울 때는 빵을 넣고, 다음에 스튜, 패스트리, 푸딩을 넣었다. 미지근한 정도로 식으면 마지막으로 허브를 넣어 밤새 말렸다. (130~133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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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팅은 가장 오래된 조리법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로스팅은 날재료를 불에 직접 넣는 것에 불과하다. 아프리카의 수렵채집인 쿵산족은 지금도 ‘트신’이라는 콩을 뜨거운 잿불에 던져서 익힌다. 불이 음식을 변형시켜 더 소화하기 쉽고 맛있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우연이든 계획적으로든―처음 발견한 행운의 인간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으리라. 찰스 램은 「로스트 피그에 관하여」라는 우화에서 로스팅의 탄생을 상상해 보았다. 중국에서 돼지를 치던 남자의 게으른 아들, 보보가 어쩌다 집에 불을 내어 새끼돼지들이 타 죽는다. 램의 이야기에서 보보는 뜨겁게 그을은 돼지 껍질을 집고는 “난생처음으로 (사실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왜냐하면 이전에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알지 못했으므로) 맛을 본다. 바삭하게 구운 돼지 껍질을!”
매혹적인 이야기이지만, 로스팅은 이런 식으로 발견되었을 리가 없다. 로스팅이 집보다도 돼지치기보다도 한참 앞서 존재했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라도 말이다. 로스팅 기술은 건축 기술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농업보다도 오래되었다. 끓이는 데에 쓸 토기의 발명, 굽는 데에 쓸 오븐의 발명보다는 200만 년 가까이 앞선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약 50만 년 전의 것으로, 최초의 수렵채집 인류였던 호모 에렉투스의 시대 막바지에 해당한다. 그렇게 집을 지어 살던 원시 인류가 농부가 된 것은 그로부터 또 수십만 년이 지난 뒤였다. 최초의 식물 재배는 기원전 9000년경 등장했다. 현대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고서도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가축 사육은 더 최근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돼지를 길렀다. 그즈음 인류는 이미 구운 고기의 맛에 수십만 년 동안 익숙한 상태였다.
어쩌면 불로 굽는 방법의 발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에 따르면, 약 180-190만 년 전 벌어졌던 최초의 요리 혹은 로스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 순간 인류는 직접 유인원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변모했다. 음식을 익히면 대체로 소화가 더 쉬워지고 영양소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인류는 익힌 음식을 발견함으로써 뇌 성장에 투입할 잉여 에너지를 얻었다. 랭엄은 이렇게 말한다. “요리가 위대한 발견이었던 것은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을 육체적으로 인간답게 만들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요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했다. 요리는 인간의 뇌가 남달리 커지도록 도움으로써, 시시한 육체에 뛰어난 머리를 제공했다.”
열과 빛의 공급원을 길들인 인류는 처음에는 불 가까이에 집을 지었고 나중에는 불을 둘러싸고 집을 지었다. 끼니를 제공하는 화덕은 집의 구심점이었다. 초점을 뜻하는 영어 단어 ‘focus’는 라틴어로 ‘화로’라는 뜻이다. 불을 피우고, 적절히 타도록 관리하고, 낮에는 연료를 충분히 공급하고, 밤에는 집에 불이 붙지 않도록 적절히 불꽃을 죽이는 등 불을 관리하는 노동은 150년 전 가스 오븐이 등장하기까지 가사의 핵심이었다. 오늘날 ‘커퓨(curfew)’라는 영어 단어는 주로 10대의 통금시간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원래는 주방용품이었다. 밤에 가족이 잘 때 불씨를 보존하기 위해서 잉걸불에 덮어두는 큰 금속 덮개를 말했다. 요리 자체가 대체로 불을 관리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111~113쪽)
19세기 들어 한참이 지났을 때까지도 서양 요리는 직화로 로스팅하는 행위와 밀폐된 오븐으로 베이킹하는 행위를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했다. 브리야사바랭에게 내가 닭을 익히는 방식은 로스팅과 무관했다. 이전 세기의 요리사에게 우리의 ‘로스트’는 로스팅이 아니라 반쯤은 굽고 반쯤은 재료 자체의 지방에 담가 끓이는 요상한 방식으로 익힌 고기일 뿐이다. 원래 로스팅이라고 하면 첫째, 개방된 화덕을 써야 했고, 둘째, 꼬챙이에 꿰어 돌려야 했다(‘roast’는 ‘돌리다’는 뜻의 ‘rotate’와 어원이 같다).
애초 직화 로스팅―조절하지 않은 불길에 식재료를 그냥 쑤셔넣는 것―은 조잡하고 성급한 방법으로서, 고기가 질기고 기름지게 익는다. 근육 단백질은 지나치게 익어 질겨지지만 결합조직의 콜라겐은 미처 연해질 겨를이 없다. 진정한 로스팅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과정이다. 요리사는 불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내내 꼬챙이를 돌린다. 고기가 회전한다는 것은 곧 특정 부위에 열이 지나치게 축적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그을지 않는다. 느리게 서서히 익히면 고기는 계속 연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요리사는 불길이 충분한지, 꼬챙이를 좀더 불길 가까이 옮겨야 하는지 시시각각 빈틈없이 신호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로스팅 요리사는 타고날 뿐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꼬챙이를 돌리는 단순한 중노동 외에도 요리사는 꼬챙이에 꿴 음식의 상태를 육감으로 느껴야 한다. 탈 것 같은 순간이나 불을 더 지펴야 하는 순간을 직감으로 알아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개방형 화덕에서 꼬챙이로 굽는 것은―수백 년간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은 기법임에도 불구하고―원시적이고 더러운 방법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이반 데이는 버럭 화를 낸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로스팅은 발전된 기술과 뛰어난 고유의 조리법이 동원된, 대단히 세련되고 통제된 과정일 때가 많았습니다.” 꼬챙이 로스팅은 네안데르탈인에게나 어울리는 요리법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로스팅에 푹 빠진 데이는 이렇게 대꾸한다. “나는 ‘전자레인지로’ 조리한 소고기를 먹느니 네안데르탈인처럼 조리한 소고기를 먹겠습니다.” (114~116쪽)
불을 다루는 복잡한 일을 제외할 때, 꼬챙이 로스팅의 또다른 문제는 음식을 꼬챙이에 확실히 붙들어매는 것이었다.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빙글 돌리면 고기는 가만히 있고 꼬챙이만 돌기 쉽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양한 전략을 동원했다. 한 방법은 꼬챙이에 작은 꼬치들을 꽂을 구멍을 뚫은 뒤 납작한 꼬치들로 고기를 찔러 제자리에 잡아두는 것이었다. 또다른 해결책은 갈고리처럼 생겨 고기를 움켜잡는 ‘홀드패스트’를 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기를 제자리에 붙들었으면, 더 힘든 과제가 요리사를 기다렸다. 가장 까다로운 과제이기도 했다. 고기가 익는 몇 시간 동안 어떻게 줄기차게 꼬챙이를 돌릴 것인가?
중세 영국의 부잣집 부엌에서는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는커녕 심신만 피폐해지는 일이 많았다. 요리 보조, 설거지, 허드렛일 등등. 그중에서도 턴스핏(turnspit) 혹은 턴브로치(turnbroach)라고 불렸던 일보다 더 열악한 작업은 드물었다. 그것은 로스팅용 꼬챙이를 돌리는 사람(보통 소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위대한 전기작가 존 오브리의 글에는 “옛날에는 가난한 소년들이 꼬챙이를 돌리며 국물받이를 핥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헨리 8세 시절 왕의 식솔에는 턴스필 한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로스팅한 수탉과 오리, 사슴과 소에 대한 왕의 식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얼굴을 그을려가며 팔을 혹사시켰다. 불가의 좁아터진 곁방에 처박힌 소년들은 고기를 돌릴 때 자신들도 익다시피 했을 것이다. 1530년대까지 햄프턴 궁전의 주방 일꾼들은 거의 홀딱 벗거나 구저분한 옷을 대강 걸친 채 일했다. 헨리 8세는 그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꼬챙이 돌리는 노동을 줄여준 것이 아니라 주방장들에게 어린 일군들을 점잖게 차려입히라며 의상비를 주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더 더워졌다. 그보다 더 작은 부엌들도 턴스핏을 고용했다. 1666년 런던 미들 템플의 변호사들은 잡일꾼 둘, 주방장, 주방장 보조와 함께 ‘턴브로치’도 한 명 고용했다. 18세기 들어서도 한참 동안 사람들은 턴스핏이 아이에게 적절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스코틀랜드 고산지대 출신의 존 맥도널드(1741~1796)는 이름난 집사로서 평생 하인으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고아인 맥도날드가 처음 맡았던 일은 아기 요람 흔들기였는데, 그 일에서 잘리자 어느 신사의 집에 꼬챙이 돌리는 소년으로 취직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사실 그즈음에는 꼬챙이 돌리는 소년이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영국에서는 소년들의 일을 동물들이 거의 넘겨받았다. 1576년 출간된 개에 관한 책을 보면 “턴스팃”을 “부엌에서 일하는 개”라고 정의해놓았다. 사람들은 교배를 통해서 다리가 짧고 몸통이 긴 개를 일부러 얻었다. 개들은 화덕 근처 벽에 높게 매단 지름 약 75센티미터의 쳇바퀴에 꼼짝없이 갇혀 별 수 없이 돌고 또 돌았다. 쳇바퀴는 도르래를 통해서 꼬챙이와 이어졌다.
어떤 요리사들은 개보다 거위를 선호했다. 1690년대 기록에는 거위가 개보다 꼬챙이 돌리기에 더 낫다는 말이 있다. 거위는 더 오래, 가끔은 내리 12시간까지도 쳇바퀴를 돌릴 수 있었다. 개는 그 일을 하기에는 너무 총명한 것 같았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개 쳇바퀴를 목격했던 토머스 서머빌은 개들이 “저녁으로 통구이를 할 것 같다는 낌새를 채면 당장 숨거나 달아나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우리 곁에는 이제 턴스핏용 개 품종이 없다. 사람들이 문득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 관행이 사라진 것이라면 오죽 좋겠느냐만, 역사는 대개 그렇게 나아가지 않는다. 미국의 식당 주방에서는 19세기까지도 쳇바퀴가 쓰였다. 최초의 동물권 운동가였던 헨리 버그는 (곰 골리기 놀이 같은 다른 동물 학대와 더불어) 개를 쓰는 로스팅 쳇바퀴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버그가 하도 법석을 피우니 다른 사람들도 그 관행을 조금 부끄러워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뜻밖이었다. 버그가 개 쳇바퀴를 검사하려고 주방들을 불시에 방문했을 때, 개 대신 흑인 아이들이 불가에서 일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보게 되었던 것이다. (122~124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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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용도라는 점에서, 혹은 요리 문화에 필수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중국의 부엌칼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이 놀라운 칼은 종종 클리버라고 불린다. 서양의 푸주한이 고깃덩어리에서 뼈를 바르는 데에 쓰는 손도끼 모양의 클리버처럼 날이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부엌칼은 서양 클리버와는 달리 만능 칼이다. 인류학자 E. N. 앤더슨에 따르면, 중국 부엌칼은 최소의 비용과 노력으로 최대의 가치를 끌어내는 ‘최소최대’ 원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때 강조점은 절약에 있다. 최고의 중국 부엌은 최소한의 용품으로 최대한의 요리 능력을 뽑아내야 한다. 중국 부엌칼은 그 명제에 알맞다. 앤더슨은 넓적한 그 칼을 다음과 같은 작업에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장작 패기, 생선 내장 꺼내고 비늘 벗기기, 채소 썰기, 고기 다기지, (날을 눕혀) 마늘 으깨기, 손톱 깎기, 연필 깎기, 나무젓가락 깎아 만들기, 돼지 잡기, 면도하기(그만큼 예리하다. 최소한 그만큼 예리하게 관리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묵은 원한이나 새로운 원한 청산하기.
중국 부엌칼의 다재다능함이 더욱 돋보이는 까닭은―가령 이누이트의 울루와는 달리―이른바 세계 2대 요리의 하나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다른 하나는 프랑스 요리이다). 고대부터 중국 요리의 특징은 재료를 잘게 썰어 여러 가지 맛을 섞는 것이었다. 그것은 칼 덕분에 가능했다. 중국에 철이 도입된 주나라 시기(기원전 1045`256), 미식은 ‘썰고 익힌다’는 의미로 ‘코펭(害烹)‘이라고 불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자(기원전 551-479)는 제대로 썰지 않은 고기는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기원전 200년 무렵 요리책이 다양한 표현을 동원해 썰고 다지는 작업을 설명했던 것을 보면 그때부터 이미 고차원적인 칼질(‘다오공[刀工]’)이 있었다.
전형적인 중국 부엌칼은 날의 길이가 18-28센티미터쯤이다. 그 점은 유럽 부엌칼과 비슷하다. 극단적으로 다른 점은 폭이다. 중국 부엌칼은 폭이 약 10센티미터로 유럽 부엌칼의 가장 넓은 부분보다도 두 배쯤 넓다. 또한 폭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가늘어지거나 휘거나 뾰족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상당히 큼직한 직사각형 강철이지만, 막상 쥐어보면 놀랄만큼 가볍고 얇다. 프랑스 클리버보다 훨씬 더 가볍다. 그런 칼은 사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칼질은 대개 날의 곡선을 따라 앞으로 흔드는 ‘추진식’ 움직임이다. 그러나 중국의 부엌칼은 날이 직선이기 때문에 위아래로 치게 된다. 중국의 칼질 소리는 프랑스보다 더 시끄럽고 타악기적이다. ‘톡톡톡’이 아니라 ‘탁탁탁’이다. 그러나 시끄럽다고 해서 거친 기술은 아니다. 프랑스 요리사가 여러 칼을 동원해서 처리하는 주사위 썰기, 쥘리엔 등의 모양내기를 중국 요리사는 칼 하나로 훨신 더 다양하게 해낸다. 명주실처럼 가늘게 썰기(8센티미터 길이로 가늘게), 은바늘에 꿰는 명주실처럼 가늘게 썰기(그보다 더 가늘게), 말귀 모양 썰기(3센티미터 길이로 경사지게), 깍뚝썰기, 채 썰기, 기타 등등을 다 해낸다.
이 탁월한 칼은 한 발명가의 고안품이 아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 이름은 잊혔다. 중국 부엌칼과 그것이 탄생시킨 요리 문화는 환경의 산물이었다. 중국인이 무쇠를 알게 된 것은 기원전 500년경이었다. 무쇠는 청동보다 싸게 생산할 수 있었고, 큼직한 금속에 나무 손잡이를 단 칼을 만들 수 있었다. 중국 부엌칼은 무엇보다도 검소한 농민 문화의 산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칼로 재료를 작게 썰어서 한 접시에서 모든 재의 맛이 어우러지게 했다. 재료를 작게 썰면 이동식 화로와 같은 불 위에서 더 빨리 익었다. 중국 부엌칼은 모든 재료를 작게 썰고 재빨리 익히고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부족한 연료를 최대한 활용하게끔 하는 절약의 도구였다. 하나의 기술로서 중국 부엌칼은 첫인상보다 훨씬 더 현명한 도구이다. 칼을 웍과 함께 쓰면 최소의 에너지로 최대의 맛을 끌어낼 수 있다. 재료를 잘게 썰어 볶으면 음식물 표면이 기름에 더 많이 닿아서 금세 익으면서도 씹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중국 부엌칼에도 교환관계가 성립한다. 요리 시간을 주여 전광석화처럼 볶으려면 재료 준비에 적잖은 노력과 기술을 들여야 한다. 우리가 닭을 통째 오븐에서 익히면 1시간이 넘게 걸린다. 가슴살이라도 20분은 걸린다. 반면에 작게 썬 닭고기 조각은 5분 미만으로 익힐 수 있다. 다만 써는 과정에서 시간이 든다(숙련자라면 그 시간도 단축된다. 유튜브를 찾아보면 요리사 마틴 얀이 닭 한 마리를 18초 만에 해체하는 동영상이 있다). 중국 요리는 지역마다
차이가 크다. 쓰촨 요리는 맹렬하게 맵고, 광둥 요리는 콩과 해산물을 풍성하게 쓴다. 그 광활한 땅의 요리사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바로 칼질, 그리고 하나의 칼을 쓴다는 점이다.
중국 부엌칼은 전통 중국 요리를 형성한 ��심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매끼 식사는 ‘판(飯)’―보통 쌀을 뜻하지만 다른 곡물이나 국수일 수도 있다―과 ‘차이(菜)’, 즉 채소와 고기 요리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 형태의 식사를 준비할 때, 채소와 고기를 다양한 형태로 썰어주는 칼은 다른 어떤 재료보다도 핵심적이다. 칼질 기법은 다채롭고, 각각 이름이 있다. 당근을 썬다고 하자. 수직으로 썰까(‘키[切]’), 수평으로 썰까(‘피안[片]’), 더 잘게 썰까(‘칸[砍]’), 모양은 어떻게? 채 썰기(‘시[絲]’), 작게 깍뚝썰기(‘딩[丁]’), 큼직하게 깍뚝썰기(’쿠아이[塊]’)? 어떤 방식을 택하든 원칙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요리사는 정밀한 칼질로 평가된다. 명나라 때 황제의 명으로 옥에 갇힌 루수라는 사람의 일화가 있다. 루수는 옥에서 고깃국을 한 사발 받고는 어머니가 다녀갔음을 알아차린다. 어머니만이 고기를 그렇게 완벽한 사각형으로 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부엌칼은 무시무시해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사람 손에 들리면 그 위협적인 날은 섬세한 도구가 되어 프랑스 요리사가 특수한 칼을 잔뜩 동원해서 해내는 작업을 똑같이 정밀하게 해낸다. 숙련된 손에 들린 중국 부엌칼은 생강을 양피지처럼 얇게 썰고, 채소를 날치알처럼 잘게 다진다. 칼 하나로 거창한 연회를 다 준비할 수 있다. 칼은 물렁한 가리비를 썰고, 줄기콩을 5센티미터로 자르고, 오이를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다.
중국 부엌칼은 고급 요리에만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칼질과 양념은 같게 하되 비싼 재료만 빼면 된다. 부자의 음식과 빈자의 음식이 서로 다른 세계를 이룬 영국 요리와는 달리(부자는 로스트 비프를 식탁보에서 먹었고 빈자는 빵과 치즈를 손으로 먹었다), 중국 요리는 칼 덕분에 서로 다른 사회계층 사이에 통일성을 유지했다. 중국에서 가난한 요리사는 부자 요리사에 비해 채소와 고기가 훨씬 더 부족하겠지만 무엇이든 재료를 다루는 방식은 같다. 재료를 다루는 그 기술이야말로 중국 음식을 중국 음식으로 만드는 특징이다. 중국 요리사는 다양한 형태의 생선과 가금류, 채소와 고기를 모두 한 입 크기의 정확한 기하학적 조각으로 썰어낸다.
중국 부엌칼의 또다른 중요한 능력은 먹는 사람이 칼질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점이다. 중국에서 식사용 나이프는 불필요할뿐더러 조금 역겨운 것으로 간주된다. 식탁에서 음식을 써는 것은 푸주한의 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엌에서 칼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먹는 사람은 균일한 음식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된다. 부엌칼과 젓가락은 완벽한 공생관계이다. 부엌칼로 썰고, 젓가락으로 먹는다. 이 식사법 또한 전통적인 프랑스 식사법에 비해 더 절약적이다. 프랑스에서는 부엌에서 이런저런 칼로 일껏 잘라놓고도 식사할 때 또 칼이 필요하지 않은가.
중국 부엌칼의 사용법은 유럽과는(따라서 미국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칼 문화를 반영한다. 중국 요리의 대가는 칼 하나로 요리하는 데에 비해 프랑스 요리의 대가는 푸주용 칼과 뼈 바르는 칼, 과도와 생선 칼 등등 기능이 천차만별인 많은 칼들을 쓴다. 단순히 연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국 부엌칼은 유럽 궁정 요리와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요리와 식사를 상징한다. 소고기, 셀러리, 생강을 잘게 썰어 볶은 뒤 두반장으로 맛을 낸 쓰촨식 요리에 섬세하게 균형 잡힌 맛의 사오싱 황주를 곁들인 식사, 그리고 핏덩어리 고깃점을 통째 식탁에 올리고 먹는 사람 마음에 따라 겨자로 맛을 더하면서 날카로운 나이프로 썰어 먹는 프랑스 스테이크 사이에 넓디넓은 간극이 있다. 두 식사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대변한다. 다지는 문화와 써는 문화는 다르다. (87~92쪽)
1669년, 루이 14세는 리슐리외의 선례를 따라 프랑스의 모든 날붙이 제작자에게 뾰족한 나이프를 만들지 말라는 칙령을 내렸다.
양날 칼을 금하는 칙령은 식사 예절과 도구의 전반적인 변화와 발 맞춘 현상이었다. 당시 유럽은 저명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이라고 명명한 과정을 겪었다. 당시부터 식탁에서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시대는 과의 굳은 신념들이 무너지는 시절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분열했고 기사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한때 용인되었던 식사 습관을 갑자기 역겹게 느끼기 시작했다. 공동 접시에서 손가락으로 고기를 집는 것, 그릇에 입을 대고 수프를 마시는 것, 날카로운 칼 하나로 모든 음식을 자르는 것. 한때 궁정 예절에 완벽하게 부합했던 이런 행동들이 이제 미개한 짓으로 간주되었다. 유럽인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식탁에 날카로운 칼을 두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인과는 달리 칼을 계속 쓰기는 썼다. 다만 다양한 방법으로 칼을 무력화했다.
프랑스에서는 식탁에서 칼을 아예 치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과일을 깎고 자르는 것처럼 몇몇 특수한 작업에는 예전처럼 개인용 칼을 꺼내 썼다. 영국에서는 식탁에 칼을 남겼지만 칼날이 현격히 무뎌졌다.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식사용 나이프는 부엌칼의 축소판이었다. 날은 단검 같은 모양, 주머니칼처럼 직선인 모양, 언월도처럼 휜 모양으로 다양했다. 양날도 있고 외날도 있었다. 어쨌든 모든 칼이 날카로웠다(적어도 반짝거리는 새것일 때는 날카로웠을 것이다).
18세기 식탁용 나이프는 전혀 달랐다. 갑자기 날이 눈에 띄게 무뎌졌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완전히 둥글어지는 것도 있었다. 요즘 우리가 버터 칼이라고 부르는 형태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식사용 나이프는 이미 칼로서의 능력이 없는 도구로 바뀌어 버터를 바르고 포크에 음식을 얹고 부드러운 음식을 가르는 데만 쓰였기 때문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새 나이프는 쥐는 방식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단검으로 사람을 찌를 때처럼 손아귀에 칼을 거머쥐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딘 칼등에 검지를 우아하게 얹고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감싸쥐는 방식으로 변했다. 요즘도 그것이 나이프를 예의 바르게 쥐는 방식이다. 요즘 사람들이 칼질에 서툴어진 데는 그 점이 한몫했다. 부엌칼도 식사용 나이프처럼 쥐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인데, 그러면 위험천만하다. 부엌칼을 쥘 때는 검지를 칼등에 얹으면 안 된다. 그러면 엄지를 칼날 아래로 감고 검지를 위로 감아 손잡이를 단단히 거머쥘 때보다 손을 다칠 위험이 훨씬 더 높다. 자나 깨나 날카로운 것을 삼가도록 가르치는 식탁 예절을 잘 배울수록 부엌 일은 잘못 배우는 셈이다.
18세기 예의 바른 서양인은 앙증맞은 나이프를 우아하게 쥔 채 폭력과 위협의 기색을 띤 동작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쓰면서 먹었다. 나이프는 절단 기술로는 거의 쓸모없게 전락했다. 18세기 말 유명한 셰필드 나이프는 여전히 최고급 강철로 만들어졌지만 절단 도구라기보다 전시용 물건이었다. 런던 사교계에서 셰필드 나이프는 안주인의 훌륭한 취향과 부를 과시하는 아름다운 물체로 식탁에 오를 뿐이었다. 현대의 나이프는 한물간 기술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이프가 칼로서 쓸모없다는 사실은 날카로운 톱니형 스테이크 칼(프랑스 남부 라이올에서 처음 세상에 내놓은 물건이다)이 따로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스테이크 칼은 보통의 나이프를 힐난하는 존재이다. 식탁에서 정말로 무엇인가 자르고 싶다면 보통의 나이프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셈이니까.
식사용 나이프는 무기용 칼과는 전혀 다른 물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칼을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러면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그랬다. 1769년 런던에서 이탈리아의 문필가 주세페 바레티는 공격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던 중 소형 접이식 과도로 상대를 찔러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바레티는 사과, 배, 사탕과자를 자를 용도로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대륙에서는 통상적인 일이라고 변론했다. 바레티가 영국 법정에서 그렇게 시시콜콜 설명해야 했다는 것은 1769년 영국에서 칼의 성격이 이미 크게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날카로운 나이프란 불필요하고 심지어 바람직하지 않은 물건으로 보였다. 이 점에서는 영국이 앞장섰다.
그런데 나이프의 문제는 날카로움만이 아니었다. 음식을 맛있게 즐기게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도 있었다. 그 점에서는 20세기에 스테인리스스틸이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프의 진가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셰필드 나이프가 선호했던 탄소강은 과거의 다른 재료보다는 날을 벼리기에 훨씬 더 뛰어난 금속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사실도 있다. 탄소강은 그냥 철처럼 몇몇 음식의 맛을 버린다. 산성 음식은 스테인리스스틸이 아닌 강철에 끔찍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유명 에티켓 전문가인 에밀리 포스트는 강철 날에 “식초가 조금이라도 닿았다가는 날이 잉크처럼 검게 변한다”고 썼다. 비네그레트 소스와 강철 나이프는 특히 나쁜 조합이었다. 요즘도 프랑스에서는 샐러드 채소를 나이프로 자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생긴 규칙이었다.
생선도 문제였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생선에 레몬이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스테인리스스틸이 발명되기 전에는 레몬을 뿌린 생선을 나이프의 슴베 부분으로 덜어 먹으면 맛을 망쳤다. 레몬의 산이 강철과 반응하여 쓴 금속성 뒷맛을 남김으로써 생선의 섬세한 맛을 압도했던 것이다. 19세기에 생선용 은 나이프가 제작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즘은 은 나이프가 무의미한 허식으로 보이는데, 과거에는 은은 부자만 누릴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어쨌든 주로 실용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강철 나이프와는 달리 은 나이프는 접시의 레몬 즙과 반응하여 부식되지 않았다. 그것을 조가비 모양으로 만든 까닭은 금속 식기들이 담긴 서랍에서 쉽게 구별되게 하려는 것이었다(생선은 고기와는 달리 질기지 않으므로 애써 썰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 디자인이기도 했다). 은 나이프가 없는 사람은 포크 두 개로, 혹은 포크와 빵 조각으로, 혹은 부식된 금속 맛을 참으면서 생선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95~98쪽)
브레이스는 근대 이전의 섭취방법이 주로 ‘쑤셔넣고 끊어내기’였을 것이라고 본다. 브레이스가 ���접 명명한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그다지 우아한 방법은 아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우선 한 손으로 음식을 잡는다. 이로 음식을 한 입 단단히 문다. 그리고 손에 잡은 음식을 입에 문 조각에서 확 뜯어낸다. 손으로 단호하게 잡아당겨도 좋고, 수중에 모종의 절단 도구가 있다면 입술을 베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써도 좋다. 이것이 바로 ��음에는 석기만, 나중에는 날카로운 칼만 가지고 있었던 우리 선조가 질긴 음식을, 특히 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쑤셔넣고 끊어내기’ 방식은 고대부터 면면히 이어졌다. 칼날은 철에서 강철로 바뀌고 손잡이는 나무에서 도자기로 바뀌었으나 먹는 방법은 그대로였다.
18세기 말 서양에서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방식이 널리 채택된 것은 ‘쑤셔넣고 끊어내기’ 방식의 종말을 뜻했다. …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포크는 요상하고 허식적이라며 비웃음을 사던 물건에서 교양있는 식사에 꼭 필요한 도구로 탈바꿈했다. 이제 사람들은 쑤셔넣고 끊어내는 대신 포크로 음식을 고정하고 나이프로 썰어서 별로 씹을 것도 없을 만큼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나이프가 무뎌지면서 음식은 전반적으로 더 부드러워져야 했으므로 더더욱 씹을 필요가 줄었다.
브레이스의 데이터에 따르면, 식사 예절의 혁명은 치아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브레이스는 라틴어로 ‘자르다’라는 뜻의 단어 ‘incidere’에서 온 용어 ‘절치(incisor, 앞니)’가 잘못 지어진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앞니의 진정한 용도는 절단이 아니라 음식을 무는 것이다. 브레이스는 “앞니가 돋은 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쓰다 보면 대체로 위 아래가 맞물리는 교합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이프와 포크로 음식을 잘라 한 입 크기로 먹게 되면서부터 앞니가 붙잡는 기능으로 쓰이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윗니가 계속 자라 아랫니와 맞물리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피개교합이다. (102~103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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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칼이 안전한 칼이라는 말이 있다(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의 요리사들에게는 칼을 날카롭게 관리하는 노하우가 보편적 기술에서 개인적 취미로 전락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칼을 갈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몇 페니 혹은 에일 한 파인트를 대가로 받고 집 안의 모든 칼을 몇 분 만에 몽땅 갈아주었다. 그 직업은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열성적인 칼 애호가들이다. 애호가들은 직업이나 필요에 의해서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칼을 갈며, 온라인 동호회에서 요령을 교환한다. 어떤 도구로 가장 완벽하게 날을 세울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는 애호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물에 적신 일본식 숫돌이냐, 전통적인 마른 숫돌이냐, 아칸소 숫돌(노배큘라이트)이냐, 합성 산화알루미늄 숫돌이냐(전동 칼갈이를 선호하는 애호가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런 기계는 보통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날을 갈아서 좋은 칼을 망친다는 평을 듣는다).
어떤 도구를 택하든 기본 원리는 같다. 거친 연마재에서 시작해서 점차 결이 고운 연마재로 바꾸면서 날이 원하는 만큼 날카로워질 때까지 금속을 약간 갈아내는 것이다. 더불어 칼을 쓰기 전에 강철 줄에 몇 번 문질러서 다듬기도 한다. 줄질은 날카로운 칼을 날카롭게 지켜주지만 무딘 칼을 날카롭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칼이 날카롭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각도의 문제이다. 베벨(bevel)이라고 불리는 경사면이 양쪽에서 뾰족한 V를 이루면서 만나면 그 날은 날카롭다. 날카로운 칼의 단면을 잘라보면, 서양의 전형적인 부엌칼은 경사면 각도가 약 20도이다. 유럽 칼은 보통 날의 양면을 다 가는 이중 경사면 형태이므로 전체 각도는 40도가 된다. 칼날은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닳아서 차츰 무뎌진다. 칼 가는 도구의 기능은 V자 양면에서 금속을 조금씩 갈아냄으로써 원래 각도를 되찾아주는 것이다. 자주 쓰고 많이 갈면 칼날이 점차 닳아 없어진다.
이상적인 우주에서는 경사도가 0도인 칼이 가능할 것이다. 무한히 날카로운 칼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 날렵한 칼은 면도날처럼 잘 베겠지만, 날이 너무 얇으면 약해서 쿵쿵 다지는 작업을 견디지 못할 테니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서양의 부엌칼은 약 20도로 갈지만 일본의 부엌칼은 15도까지 더 얇게 갈 수 있다. 일본식 부엌칼을 선호하는 요리사가 많은 하나의 이유이다.
애호가들의 의견이 갈리는 문제는 그 밖에도 수두룩하다. 칼은 큰 것이 좋을까? 묵직한 칼을 쓰면 사람이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이 있다. 작은 것이 좋을까? 무거운 칼을 쓰면 팔이 아프다는 이론도 있다. 날은 일자형이 좋을까 휜 것이 좋을까? 칼날을 시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엄지를 대고 눌러서 자신의 능숙함을 과시해야 할가, 채소든 볼펜이든 물체를 잘라봐야 할까? 혀로 시험할 수 있다는 농담도 있다. 잘 선 날은 금속 맛이 나고, 정말로 잘 선 날은 피 맛이 난다.
칼을 날카롭게 관리하고 다루는 능력을 습득하면, 우리가 부엌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신감이 생긴다. 칼 애호가들의 유대감은 그 사실을 깨쳤다는 데에서 온다. 나 역시, 요리 인생에서 창피할 만큼 뒤늦은 시점이기는 해도, 왜 요리사들이 칼을 사장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마침내 깨달았다. 칼을 잘 알면 양파나 베이글 앞에서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재료를 보면 원하는 크기로 얼마든지 썰 수 있다는 판단이 든다. 요리는 새로운 경지에 오른다. 큰 덩어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게끔 양파를 정확하게 잘 다지면 리소토가 부드럽고 근사한 맛을 낸다. 양파와 쌀알이 조화롭게 섞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빵칼이 있으면 근사하게 얇은 토스트를 만들 수 있다. 날카로운 칼의 주인이 되는 것은 곧 주방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78~80쪽)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서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할 때 그것을 꺼내 썼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용 식사용 칼을 칼집에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다.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칼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자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칼은 요즘의 손목시계처럼 도구인 동시에 의상이었다. 누구나 가지는 소유물이었고, 종종 가장 아끼는 소유물이었다. 해리 포터의 마법 지팡이처럼 칼은 소유자에게 맞춤으로 제작되었다. 손잡이는 청동, 상아, 수정, 유리, 조개껍데기로 만들었다. 호박, 마노, 자개, 거북 껍데기로도 만들었다. 아기, 사도(使徒), 꽃, 농부, 깃털, 비둘기 모양의 장식을 깎고 새겼다. 오늘날 우리가 남의 칫솔로 이를 닦지 않듯이 당시에는 남의 칼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손목시계처럼 습관적으로 차고 다녔기 때문에 아예 몸의 일부가 되어, 종종 차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6세기의 문헌(‘성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수도사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허리띠에서 칼을 풀라고 상기시킨다. 자다가 자기 칼에 찔리면 안 되니까.
그것은 실제로 중대한 위험이었다. 당시의 칼은 단검 모양인 데다가 정말 날카로웠다. 질긴 치즈에서 딱딱한 빵까지 온갖 것을 베려면 날카로워야 했다. 옷을 제외하면 칼이야말로 성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물건이었다. 칼에는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는지라 남자만 배타적으로 사용했다는 그릇된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도 차고 다녔다. 스위스의 부유한 가족을 묘사한 H. H. 클루버의 1640년 그림이 있다. 가족은 고기, 빵, 사과로 식사를 차리는 중이다. 딸들은 머리에 꽃을 꽂았는데, 허리에는 은으로 된 칼을 밧줄로 매달아 붉은 드레스에 늘어뜨렸다. 그렇듯 노상 칼을 지니고 다녔다면 칼의 구조도 잘 알았을 것이다.
칼의 구조는 보통 다음과 같다. 날의 맨 앞 뾰족한 부분은 끝(포인트)이라고 부르며, 찌르거나 뚫기에 알맞다. 칼끝으로는 패스트리를 가르고, 반으로 가른 레몬에서 씨를 튕기고, 삶은 감자를 찔러 다 익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날의 몸통에서 날카로운 아랫부분은 배(벨리)라고도 부르고 곡선(커브)이라고도 부른다. 채소를 채 써는 것부터 에스칼로프를 어슷하게 써는 것까지 대부분의 절단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날을 옆으로 뉘면 마늘도 빻을 수 있다. 마늘 분쇄기여, 안녕! 날의 몸통에서 배의 반대쪽인 윗부분은 논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시피 등(스파인)이다. 그 모서리는 무디기 때문에 절단 능력은 없지만 무게와 균형을 더해준다. 날의 몸통에서 손잡이 바로 앞의 두껍고 날카로운 부분은 뒤꿈치(힐)라고 부른다. 견과나 양배추처럼 단단한 것을 묵직하게 힘주어 써는 데에 알맞다. 뒤꿈치에 이어지는 부분은 슴베(탱)이다. 금속이 손잡이 속으로 들어간 부분을 말하며, 날과 손잡이를 붙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슴베는 손잡이 중간까지만 이어져 있을 수도 있고 끝까지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 고급 일본식 부엌칼은 슴베가 아예 없는 것도 있다. 날부터 손잡이까지 칼 전체를 하나의 쇳덩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손잡이 맨 끝은 밑동(버트)이라고 부른다. (81~82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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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많은 부엌은 소박한 방식으로나마 ‘바트리 드 퀴진’을 추구한다. 그것은 냄비 보관대에 착착 끼워진 법랑 냄비 삼총사일 수도 있고,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가지런히 늘어선 르크루제 냄비들일 수도 있다. 바트리 드 퀴진은 계몽과 혁명의 18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었다. 그 이면에는 한 솥 요리의 한계와 정반대되는 발상이 있었다. 요즘도 프랑스어로 ‘고급 요리’를 뜻하는 오트 퀴진(haute cuisine)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열렬히 추종하는 그 발상은 요리의 각 요소마다 그에 맞는 특수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다. 옆면이 경사진 프라이팬에서는 소테를 할 수 없고, 옆면이 각진 소테팬에서는 흔들어 볶을 수 없으며, 가자미 냄비 없이는 가자미를 데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작업마다 맞는 도구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18세기 요리에 새롭게 등장한 전문가주의와 프랑스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54쪽)
영국인이 18세기부터 팬에 까탈을 부린 것은 영국 구리 산업의 부활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전에는 구리를 스웨덴에서 수입했다. 그러다가 1689년에 스웨덴의 독점이 끝났고, 영국에서 훨씬 더 싼 비용에 대량으로 구리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중심지는 브리스톨이었다. 덕분에 구리 팬이 꽉꽉 들어 찬 찬장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19세기 초부터 조리 기구를 일컫는 보편적 용어로 자리잡은 프랑스어 ‘바트리 드 퀴진’은 어원이 구리 팬에 있다. ‘바트리’는 구리라는 뜻이고, 말 그대로 때려서(‘바터’) 모양을 잡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구리 ‘바트리’는 기나긴 냄비와 팬의 역사에서 나름대로 한 정점을 이루었다. 솜씨 좋은 장인, 품질 좋은 금속, 요리마다 맞는 도구를 만들겠다는 자세, 다양한 도구를 꼼꼼히 관리하는 데에 필요한 한 무리의 요리사들이 상주하는 부유한 부엌, 이 조합에 필적할 상대는 20세기 고급 프랑스 요리 레스토랑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환상적으로 갖추어진 부엌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영국 요리를 망쳤다는 평을 듣는다. 그들이 모든 음식을 윈저 수프 같은 갈색 곤죽으로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반론하지만, 적어도 채소에 대해서는 발뺌할 수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와 섭정 시대의 레시피는 채소를 삶을 때 우리가 정석으로 아는 시간보다 훨씬, 훨씬 더 오래 삶으라고 지시한다. 브로콜리는 20분, 아스파라거스는 15-18분, 당근은(가장 끔찍하다) 45-60분. 제아무리 최신식 팬을 가지고 있더라도 채소 삶기의 기본도 모르면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어쩌면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만큼 채소를 홀대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은 당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별로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정반대로, 그들이 지나치게 고민해서였을 수도 있다. 19세기 요리책 작가들은 질감에 민감했던 것만큼이나―그들도 우리처럼 채소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익히려고 했다―어느 정도로 팔팔 끓일 것인가 하는 점에 민감했다. 예부터 모든 요리사가 그랬듯이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도 채소를 덜 익히면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고대 그리스의 체액론(體液論) 이래 사람들은 늘 생채소를 해로운 음식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도 한편으로는 채소를 지나치게 익혀 요리를 망칠까봐 염려했다. 『요리사의 신탁(The Cook’s Oracle)』에서 윌리엄 키치너는 아스파라거스를 데칠 때 “시간을 정확히 지켜서 연해지자마자 건져야만 본연의 맛과 색이 유지되며, 그보다 1-2분이라도 더 삶으면 맛과 색이 모두 망가진다”고 조언했다. 이것은 채소 곤죽을 추구하는 사람이 할 법한 말이 아니다. 키치너가 앞에서는 아스파라거스를 20`30분 삶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더 이상하게 들린다. 더구나 그는 아스파라거스를 묶어서 데치는데, 그러면 낱낱으로 풀어서 데칠 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오래 끓이는 습관은 생각 없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옛 사람들도 최선의 조리법을 알아내고자 머리를 쥐어짰다는 사실을 교만하게 잊곤 한다. 19세기 요리책 작가들도 대부분은 ‘과학적’이거나 적어도 ‘합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조언하려고 했다. 그들이 아는 한, 무엇인가를 끓이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끓는 물이 10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상 끓여보았자 물이 증기가 될 뿐 더 뜨거워지지는 않는다. 럼퍼드 백작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펄펄 끓는 물로 요리하는 일은 연료 낭비라고 한탄했다. 온도가 더 높아지지도 않는데 무슨 짓인가? 에너지 낭비일 뿐. 1815년에 연료 경제 전문가인 러버트슨 뷰캐넌은 물이 끓는 점에 도달하면 “아무리 더 세게 끓여도 온도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고 지적했고, 요리책 저자들은 그의 말은 자주 인용했다. 윌리엄 키치너는 직접 온도계로 실험한 결과 “요리사들이 가볍게 보글거린다고 표현하는 상태도 실제 온도는 팔팔 끓일 때와 같은 100도”이더라고 말했다. 따라서 약하게 보글보글 끓이는 편이 더 낫다는 논리적 결론이었다.
1868년, 뉴욕 요리 아카데미의 미식학 교수였던 피에르 블로는 주부든 식당 요리사든 “약하게 끓이지 않고 팔팔” 끓임으로써 끓이기의 기술을 “남용하는” 사람들을 힐난했다. “훨훨 타는 불에 물을 한가득 얹고 최대한 팔팔 끓이면 증기는 잔뜩 피어오르겠지만 그렇다고 요리가 더 빨리 되는 것은 아니다. 온도는 약하게 끓일 때와 다르지 않다.” 고기 요리라면 팔팔 끓이지 말고 서서히 익히라는 조언이 적절하다(키치너는 “천천히 익힐수록 고기가 더 연��고 통통하고 희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자를 제외한 다른 채소들은 서서히 익히라는 조언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면 요리 시간이 한없이 늘어진다. 훌륭한 ‘바트리 드 퀴진’을 소유한 요리사는 최대한 작은 냄비로 끓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시 키치너를 인용해보자.
냄비의 크기는 내용물의 크기와 맞아야 한다. 소스팬이 클수록 불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지고, 물이 많을수록 끓이는 데 더 많은 불길이 필요하다. 작은 냄비는 빨리 뜨거워진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당근을 작은 냄비에서 소량의 물로 살살 끓이면 큼직한 냄비로 팔팔 끓일 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온갖 크기의 냄비가 다 있는 것보다 큰 냄비가 한두 개만 있어서 오히려 좋은 점이라면 재료와 크기가 꼭 맞는 냄비를 고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통은 냄비에 공간이 많이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부엌은 몇 개 되지 않는 팬이 하나같이 너무 작아서 그 속에 음식을 꽉 채우면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야 겨우 끓는 것이 아닐까.
19세기의 삶은 채소는 우리가 삶는 시간에만 의거하여 추측한 것만큼 지나치게 흐물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채소 자체가 요즘과 달랐다. 현대의 종자와 재배법으로 기른 식물은 옛날보다 더 연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아스파라거스는 요즘보다 더 뻣뻣했을 것이고, 당근은 더 딱딱했을 것이다. 설령 오늘날의 연한 채소를 빅토리아 시대의 방식으로 삶아도 아예 곤죽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잘게 썬 당근을 작은 냄비에 꽉꽉 채운 뒤 45분 동안 약하게 끓여보았는데, 놀랍게도 여전히 씹는 맛이 있었다. 큼직한 스테인리스스틸 냄비의 펄펄 끓는 물에 넣어 5분 동안 데친 것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찜기로 찌면 더 좋다.
어쨌든 빅토리아 시대의 끓이기 기술에는 분명 흠이 있었다. 보통의 압력에서 물이 10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은 ���연한 사실이다(압력이 높으면 더 뜨거워지는데, 압력솥에서 음식이 빨리 익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음식이 끓는 속도를 결정하는 요인은 온도만이 아니다. 끓는 물이 비등하는 정도, 즉 얼마나 팔팔 끓느냐 하는 정도도 중요하다. 요리에서의 열 전달은 간단히 말해서 음식과 열원의 온도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물이 일단 100도에 도달했다면 격렬하게 끓든 조용히 보글거리든 큰 차이가 없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논리는 이론상 옳아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과 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왜일까? 그것은 팔팔 끓는 물 분자들이 더 정신없이 움직임으로써 약하게 보글거리는 물 분자들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음식에 열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물의 양이 음식에 비해 많을 때도 열 전달이 빠르다.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넣고 채소는 조금만 넣어서 끓이면 용량을 딱 맞춘 작은 구리 냄비에 채소를 꽉 채워 끓일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익는다. 비턴 여사를 비롯한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들이 간혹 ‘힘차게’ 끓이라고 말할 때조차 시간을 길제 잡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55~59쪽)
요리책들은 필요한 도구를 나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저자들이 팬에 쓰이는 여러 물질을 훑을 때는 ‘이것도 장점은 있지만······’ 하는 양가적인 분위기가 늘 감돈다. 도자기는 좋기는 하지만 쉽게 깨진다. 내열 유리나 파이렉스도 마찬가지여서, 오븐은 괜찮지만 불에 올리면 안 된다. 은은 으리으리한 가격표 외에는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지만(잃어버리거나 도둑맞으면 물론 괴로울 것이다), 팬을 아주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음식에서 변색된 금속 맛이 날 수 있다. 무겁고 새까만 무쇠는 많은 요리사가 선호한다. 무쇠 팬은 수백 년도 쓸 수 있다. 요즘도 프랑스의 타르트타탱이나 미국의 옥수수빵 같은 가정요리에는 무쇠팬이 선호된다. “스킬렛을 꺼내요, 뚜껑을 덮어요/엄마가 작은 쇼트닝 빵을 만들 테니까”라는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제대로 길이 든 무쇠 스킬렛은 절대 눌어붙지 않는다. 그리고 워낙 묵직하기 때문에 고온으로 뜨겁게 지져도 거뜬히 견딘다. 다만 사용 후에 세심하게 말리고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흉하게 녹슨다는 점이 단점이다. 또한 소량의 철이 음식에 녹아들 수 있다(빈혈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유익하다).
이런 단점의 해결책은 무쇠에 법랑을 씌우는 것이다. 무쇠에 유리질 에나멜, 즉 법랑 유약을 입힌 사례로 가장 유명한 것은 르크루제 제품이다. 법랑의 원리는 고대부터 알려졌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유리 가루를 토기 구슬에 입혀 초고온(750-850도)에서 굽는 방법으로 법랑 장신구를 만들었다. 법랑 기법이 철과 강철에 적용된 것은 대략 1850년부터였다. 그러던 1925년, 프랑스 북부에서 사업을 하던 두 벨기에 사람이 프랑스 할머니들의 부엌마다 터줏대감처럼 존재하는 무쇠 팬에 법랑을 입히자는 생각을 해냈다. 아르망 드사게르는 금속 주조 전문가였고, 옥타브 오베크는 법랑을 잘 알았다. 둘은 합심하여 20세기 조리 기구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제품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둥근 코코트(영국에서는 캐서롤이라고 부르는 형태)만 만들었지만, 차츰 오븐에 사용할 수 있는 램킨과 제빵용 그릇, 프렌치오븐과 타진, 로스터와 웍, 타르트용 접시와 그릴 팬까지 범위를 넓혔다. 르크루제의 한 가지 매력은 알록달록한 색깔이다. 그 색깔에는 부엌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취향이 반영되었다. 1930년대에는 ‘플레임 오렌지’라는 짙은 오렌지색이, 1950년대에는 ‘엘리제 옐로’라는 선명한 노란색이, 1960년대에는 파란색이 유행했다(요리 연구가 엘리자베스 데이비드가 프랑스 골루아즈 담뱃갑에서 영감을 얻어 제안한 색깔이다). 요즘은 녹청색, 선홍색, 화강암색이 유행이다. 나는 아몬드색(크림색을 멋 부려 부른 말)을 두 개 가지고 있다. 오래 천천히 끓이는 데는 그보다 나은 도구가 없다. 무쇠는 고르게 게워지고 놀랍도록 오래 열을 유지하며, 법랑은 스튜에서 금속 맛이 나는 것을 막아준다. 르크루제는 사랑스러움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르크루제가 불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내가 아는 최고의 요리사 중 한 명(내 시어머니이다)은 파란 르크루제로 온갖 요리를 다 해낸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에 코르동블루에서 배웠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만드는 음식은 영국적이면서도 프랑스적인 화려함이 있다. 시어머니는 깔끔하게 간수된 르크루제 제품들로 꿈결 같은 ㅡ베샤멜 소스, 버터가 사르르 녹는 완두콩, 매끄러운 보라색 보르스치를 뚝딱 만든다. 르크루제는 시어미니의 요리 스타일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시어머니에게는 차가운 접시에 음식으르 내거나 어울리지 않는 식기를 차리는 일은 꿈에서도 없다. 시어머니의 무쇠 법랑은 그 분을 충실히 따른다. 그것은 갈라지는 일은 수련이 부족한 다른 가족이 감히 주방에 들어갔을 때나 발생한다. 우선 그 물건들은 무겁기 때문에, 나는 흐느적거리는 내 손목이 그것을 떨어뜨릴까봐 늘 겁이 난다. 파스타를 삶을 만큼 큰 용량은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표면이다. 너그러운 스테인리스스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고온에서 르크루제의 바닥에 음식이 얼마나 잘 들러붙는지 알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도 시어머니의 팬을 불에 조금 오래 둘었다가 태워먹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언제나 그 시점에서 시어머니가 들어와서 표백제로 싹싹 곤경을 처리했지만).
논스틱 팬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56년 테팔 사가 처음 논스틱 팬을 선보였다. “테팔 팬: 정말 들러붙�� 않는 팬”이 최초의 광고 문구였다. 음식이 팬에 붙는 것은 단백질이 팬 표면의 금속 이온과 반응하기 때문이다. 들러붙는 것을 막으려면, 단백질 분자가 표면과 반응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야 한다. 가령 격렬하게 저어서 들러붙을 틈을 주지 않거나 음식과 팬 사이에 보호막을 끼우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팬을 ‘길들임’으로써 그런 막을 만들었다. 중국의 웍이든 미국의 무쇠 스킬렛이든 법랑을 입히지 않은 철제 팬을 쓸 때는 길들이기가 중요하다. 그 단계를 빼먹으면 법랑을 입히지 않은 철제 팬을 쓸 때는 길들이기가 중요하다. 그 단계를 빼먹으면 팬은 녹슬고 요리는 망친다. 먼저 뜨거운 비눗물에 팬을 담갔다가 헹궈서 말린다. 다음으로 기름이나 비계를 문지른 뒤 몇 시간 약하게 가열한다. 그러면 지방 분자들이 중합체 형성 반응을 일으켜 표면이 번질번질 반짝거리게 된다. 그런 팬으로 요리를 하면 쓸 때마다 지방 중합체 막이 더해지기 때문에 팬은 갈수록 포마드를 바른 것처럼 번드르르해진다. 새까맣게 길이 든 웍에서는 재료들이 미끄럼을 타듯이 점프한다. 길이 잘 든 스킬렛으로 옥수수빵을 구우면 알약이 포장에서 톡 튀어나오듯이 다 구워진 방이 뚝 떨어져나온다. 그러나 길든 팬을 관리하는 데는 훈련이 필요사다. 박박 문질러 닦아서는 절대 안 된다. 토마토나 식초 같은 산성 음식도 표면을 손상시킨다. 팬에 입혀졌던 막이 다 벗겨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54년, 프랑스의 기술자 마르크 그레구아르는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화학자들은 폴리테트라플로오르에틸린(Polytetrafluorethylene, PTFE)이라는 물질을 1938년부터 알았다. 산업용 밸브나 낚시 도구를 코팅하는 데에 쓰이는 미끌미끌한 물질이었다. 추측하건대, 그레구아르의 아내가 남편에게 낚시 도구에 쓰는 PTFE로 프라이팬 문제를 해결해보라고 제안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레구아르는 PTFE를 알루미늄 팬에 입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원리는 이렇다. 앞에서 말했듯이 음식이 들러붙는 것은 음식물이 팬 표면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PTFE 분자는 다른 어떤 분자와도 결합하지 않는다. PTFE의 미세구조는 플루오르(불소) 원자 4개와 탄소 원자 2개로 구성되고, 그 구조가 무수히 반복되어 훨씬 더 큰 분자를 이룬다. 플루오르는 일단 탄소와 결합한 뒤에는 다른 어떤 물질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스크램블에그�� 스테이크 같은 상습범과도, 과학자 로버트 L. 월크에 따르면, 현미경으로 본 PTFE 분자는 뾰족뾰족 가시가 난 애벌레처럼 생겼는데, 그 ‘애벌레 갑옷’이 탄소와 음식 분자의 결합을 막기 때문에 새 논스틱 팬에 기름을 한 방울 떨구면 팬이 기름방울을 밀어내는 듯한 극적인 효과가 연출되는 것이다.
세상은 테플론에 열광했다. 듀폰 사는 1961년 미국 최초의 논스틱 조리기구 ‘해피 팬’을 출시하여 첫 해에 매달 100만 개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들러붙지 않는 팬은 대머리 치료제와 더불어 누구나 찾아헤매는 발명품이다. 2006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판매된 조리 기구의 약 70퍼센트는 논스틱 코팅 제품이었다. 논스틱 코팅은 이제 예외라기보다 기본이다.
세월이 흐르자, 논스틱 팬에도 결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나는 논스틱 제품에서 스튜를 끓이거나 소테를 하지는 않는다. 논스틱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데글레이즈에 쓸 감칠맛 나는 끈끈한 갈색 덩어리가 생기지 않으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반대 문제가 더 자주 발생한다. 경이로운 논스틱 성질이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금속으로 긁지 않고 고온에 노출시키지 않는 등 세심하게 다루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PTFE 논스틱 막이 자연스레 벗겨진다. 그래서 아래의 금속이 드러나고, 원래의 목적이 좌절된다. 나는 수명이 짧은 논스틱 팬을 무수히 겪은 후로 굳이 그것을 쓸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알루미늄, 스테인리스스틸, 무쇠 같은 전통적인 금속 팬을 길들이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그러면 팬을 쓸수록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아진다. 무쇠 팬에 기름을 둘러 요리하면 쓸 때마다 막이 덧입혀지지만, 논스틱 팬은 쓸 때마다 반질거리는 코팅이 조금씩 닳는다.
논스틱 팬을 사기에 앞서 고민할 까닭이 또 있다. PTFE는 무독성이지만 초고온으로 가열하면(250도 이상) 기체성 부산물(탄화플루오르)을 낸다. 그런 기체는 독감과 비슷한 증상을 일으켜 해로운 수 있다(‘중합체 증기 열’이라고 부른다). 논스틱 팬의 안전성에 관한 의문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제조업계는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그렇게 높은 온도로 가열될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예열한답시고 기름을 두르지 않은 채 계속 불에 올려두면 충분히 그만큼 뜨거워진다. 2005년 미국 환경보호국이 PTFE의 제조원료인 PFOA의 발암성을 조사한 일도 있었다. 주요 제조사인 듀폰사는 완성품에 잔존하는 PFOA의 양은 측정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반론했지만,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용자들은 이미 논스틱 팬의 기적을 미심쩍게 생각하게 되었다. (6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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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가마솥은 토기에 비해서 실용적인 이점이 많았다. 가마솥은 모래나 재로 박박 씻을 수 있지만 유약을 칠하지 않은 토기는 그럴 수 없으므로 미세한 구멍 속에 이전 음식의 자취가 남기 마련이었다. 또한 금속은 점토보다 열을 잘 전달하므로 음식을 효율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불에 바로 올려도 열충격으로 갈라지거나 이가 빠질 염려가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떨어뜨려도 멀쩡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점토 단지는 대개 파편이지만, 금속 가마솥은 종종 온전한 전체가 발굴된다.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배터시 가마솥이 좋은 예이다. 기원전 800-700년 석기시대의 표본인 그 가마솥은 19세기에 템스 강에서 건져졌다. 방패처럼 청동판 7개를 리벳으로 조립해 만든 호박 모양의 근사한 솥이다. 옛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도구는 경외감을 일으킨다. 그것을 보노라면 옛날 사람들이 왜 유언으로 솥을 물려주곤 했는지 납득이 된다. 그것은 훌륭한 공학적 산물이었다.
금속으로 조리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자, 냄비와 팬의 다양한 형태들이 금세 생겨났다. 고대 로마인은 오늘날의 프라이팬과 크게 다르지 않은 ‘파텔라(patella)’를 만들었다. 기름이 약간만 둘러 생선을 굽는 금속 팬이었다. 스페인의 파에야와 이탈리아어로 팬을 뜻하는 ‘파델라’는 모두 이 이름에서 온 단어들이다. 기름으로 지지는 능력은 조리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었다. 지방은 물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기름을 쓰면 물을 쓸 때보다 음식이 더 빨리 익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자리가 노릇노릇 구워진다. 그것은 단백질과 당이 고온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의 결과인데, 우리가 유혹적으로 느끼는 맛은 그 반응에서 나오는 것이 많다. 프렌치프라이의 황금색 껍질도, 숟가락 가뜩 담긴 짙은 메이플 시럽도 그렇다. 프라이팬은 가지고 있으면 좋은 물건이다.
고대 로마인은 아름다운 금속 콜랜더, 풍로 딸린 청동 단지, 납작하고 큰 접시인 파티나, 놋쇠나 청동으로 된 큼직한 가마솥, 각양각색의 장식적인 패스트리 틀, 생선을 통째 익히는 냄비, 소스를 따르기 쉽게 주둥이가 있고 착착 접히는 손잡이가 있는 프라이팬 등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물건들을 보면 황당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이다.1853년에 유명한 요리사 알렉시 수아예도 로마의 다양한 금속 조리 기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수아예는 특히 ‘아우텝사(authepsa)’에 감탄했다. 무슨 첨단장비의 이름처럼 들리는 이것은 현대적인 찜기처럼 2개의 층으로 구성된 코린트풍 청동 용기였다(‘아우텝사’는 ‘스스로 끓인다’라는 뜻이다). 수아예는 아우텝사의 위쪽 칸에서 “디저트에 알맞은 가벼운 진미들”을 부드럽게 찔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우텝사는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 키케로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어느 경매에서 아우텝사가 하도 비싸게 팔리는 바람에 지나가던 행인은 농장 전체가 팔린 줄 알았다고 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로마의 금속 조리 기구는 적층 금속판 팬이 등장하는 20세기 말까지 달리 경쟁자가 없었다. 로마인은 오늘날에도 팬 설계자의 근심거리인 과열점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했다. 로마 제국 시절 영국에서 만들어진 한 금속 팬은 바닥에 동심원이 여러 개 나 있는데, 열을 느리고 균일하게 퍼뜨리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과학자들이 바닥에 골이 진 냄비와 매끄러운 냄비를 비교 실험한 결과, 바닥에 요철이 있으면 열 응력이 낮아졌다(동심원들이 구조를 강화하기 때문에 팬이 고온에서 덜 틀어진다). 요리사의 통제력도 높아진다. 요철이 있는 팬은 열이 느리게 전달되기 때문에 음식이 성가시게 끓어넘칠 우려가 적다. 1985년 서큘론 사(社)는 바닥에 비슷한 동심원 무늬가 있는 제품들을 선보였다. 광고에 따르면, ‘독특한 요철’이 표면 마모를 줄이고 내구성과 논스틱 성질을 강화한다고 했다. 사실 그 기술은 송수관, 직선 도로, 아치형 다리, 책처럼 로마인이 가장 먼저 알아낸 것이었다.
로마인의 창의성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부터 18세기까지 가정의 요리사들은 보통 콜드론(cauldron)이라고 불린 큰 가마솥 하나로 모든 일을 해야 했다(케틀, 키틀이라고도 불렀다). 가마솥은 북부 유럽의 부엌에서 단연코 가장 큰 도구였고, 모든 요리 활동은 그것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다양했던 조리 기구는 기본적인 것들로 축소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솥 하나만 썼으므로 한 솥 요리가 다시금 지배적인 ���리 양식이 되었다. 재료가 무엇이든 가마솥이 먹는 방식을 결정했다. 주로 삶고 끓이고 졸이는 것이 답이었다(물론 뚜껑을 덮어 굽거나 쪄서 빵을 만들 수도 있었다). “뜨거운 완두콩 죽, 차가운 완두콩 죽, 가마솥에 있는 아흐레 된 완두콩 죽”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솥에 담기는 내용물은 상당히 반복적이었다. 평균적인 수준의 중세 부엌은 칼 한 자루, 국자 하나, 도기 팬 하나, 종류를 불문하고 꼬챙이 하나, 가마솥 하나쯤을 갖추었다. 요리사는 칼로 재료를 썰어서 물과 함께 솥에 넣고 몇시간 끓인 뒤에 완성된 수프나 ‘포타주’를 국자로 퍼냈다. 그 밖에는 그릇으로 쓰는 싸구려 도기 단지 몇 개, 프라이팬 하나, 가마솥보다 훨씬 더 작고 긴 손잡이가 달려 우유나 크림을 데우는 데에 쓰는 팬이 하나쯤 더 있었다.
그 외에 부엌 도구가 더 있다면, 대개 가마솥을 거드는 부속품이었다. 무쇠 기중기나 가로대는 고리에 걸린 무거운 솥과 내용물을 불에 올렸다 내렸다 하는 데에 쓰였으며, 아름답게 장식된 물건��� 있었다. 그것은 조금 위험하기는 해도 스위치를 탁 켜는 것만큼 즉각적인 온도 조절기법이었다. 그렇게 정밀한 장치를 소유할 여력이 없었던 집은 기발하게 고안된 작은 삼발이 한두 개로 솥을 불에서 약간 들어올렸다. 끓는 국물 위에 고기를 걸어두거나 솥 바닥에 있는 고기를 건지는 데에 썼던 갈고리와 포크도 가마솥 부속품이었다.
가마솥의 형태와 크기는 다양했다. 영���에서는 보통 (배가 불룩한 형태가 아니라) ‘바닥이 퍼진’ 형태를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다. 불길을 잘 견디기 위한 설계였다. 다리가 셋 달린 솥은 잉걸불에 바로 얹도록 설계한 것이었다. 더 작고 배가 볼록한 솥은 불 위에 걸어두도록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물론 손잡이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으므로, 막대기나 집게로 조작했다. 한 솥 요리는 재료들이 몽땅 섞여 이상한 조합을 빚어낼 수 있었다. 수돗물과 세제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이 솥을 얼마나 자주 닦았는지는 모르겠다. 대개는 지난 식사의 부스러기가 바닥에 남아 다음 식사의 양념이 되었다.
유럽 설화에는 텅 빈 가마솥에 대한 공포가 끈질기게 등장한다. 그것은 텅 빈 냉장고의 옛 형태였고, 속수무책의 굶주림에 대한 상징이었다. 켈트 신화에서 가마솥은 영원한 풍요와 절대적인 지식을 불러낸다고 이야기된다. 솥은 있지만 담을 음식이 없다는 것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유명한 “돌멩이 수프”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방랑자들이 빈 솥을 가지고 마을에 도착하여 음식을 달라고 부탁한다. 마을 사람들이 거절하자, 방랑자들은 돌멩이 하나를 꺼내고 물을 길어서 ‘돌멩이 수프’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사람들도 흥미를 느껴 저마다 이런저런 재료를 조금씩 솥에 넣는다. 채소 조금, 양념 조금. 결국 ‘돌멩이 수프’는 카술레(cassoulet) 같은 풍성한 스튜가 되어 모두가 함께 먹고 즐긴다.
가마솥은 상당히 비쌌다. 런던에서 살던 존 콜과 그의 아내 줄리아나의 1412년 소유물 목록에는 4실링의 가치가 있는 7킬로그램짜리 가마솥이 있다(당시 토기 단지는 1페니쯤 했고 12페니가 1실링이었다). 돈을 주고 사거나 물물교환한 솥은 몇 번이고 수리하여 수명을 연장했다. 구멍이 뚫리면 땜장이에게 돈을 주고 때웠다. 1857년 다움 카운티의 늪지에서 발굴된 청동 가마솥에는 수리한 자국이 여섯 군데나 있다. 작은 구멍은 리벳으로 메웠고 큰 구명은 녹인 청동을 부어 수리했다.
가마솥이 모든 요리에 이상적인 용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가마솥이 생기면 매 끼니의 패턴이 그것에 맞추어 결정되었다(작은 토기 냄비 한두 개로 보완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것이 있었다면 말이다). 모든 민족에게는 전통적인 한 솥 요리가 있고, 그 요리에 쓸 특수한 솥도 다양하게 전해진다. 포토푀, 아일랜드 스튜, 도브라다, 코시도. 한 솥 요리는 연료, 도구, 재료의 결핍에서 비롯된 요리였다. 한 솥 요리는 낭비를 모른다. 빈민 구제용 음식이 거의 늘 수프 형태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모두에게 돌아가기에 양이 부족하다면 언제든 물을 부어 한 번 더 끓이면 되니까. (44~49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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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숟가락은 딱히 세련된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경쟁에서 진 꼴지에게 주는 상품으로 자주 쓰이겠는가? 그러나 나무 숟가락에도 과학이 담겨 있다. 나무는 마모시키는 성질이 없어서 팬에 부드럽게 닿는다. 때문에 금속 표면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박박 긁어도 된다. 나무는 반응성도 없기 때문에 음식에 금속 맛이 남을까 걱정할 필요도, 산성 시트러스나 토마토와 닿았을 때 숟가락 표면이 변질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나무는 또한 열 전도율이 낮다. 그래서 손이 델 걱정 없이 뜨거운 수프를 저을 수 있다. 이런 기능들을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나무 숟가락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나무 숟가락은 우리 문명의 일부이다. 도구란 처음에는 어떤 필요를 만족시키거나 특정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채택되지만, 도구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시간이 흐를수록 문화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현대는 스테인리스스틸 팬의 시대이므로, 우리는 사실 금속 숟가락으로도 팬을 망가뜨리지 않고 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왠지 잘못된 기분이 든다. 금속 숟가락의 딱딱한 모서리는 세심하게 썬 채소들을 으깨버리고, 손잡이는 손아귀에 아늑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나무 숟가락은 톡톡 부드러운 소리를 내지만 금속 숟가락은 거슬리게 쨍그랑거린다.
현대는 또한 플라스틱의 시대이므로, 우리는 합성물질로 된 주걱을 선택할 수도 있다. 나무 숟가락은 식기세척기에 맞지 않기 때문에 더 그렇다(나무를 식기세척기로 자주 씻으면 갈수록 물렁해지고 갈라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나무 숟가락을 선택한다. 나는 요전 날 주방용품 가게에서 ‘실리콘 나무 숟가락’이라는 괴상한 물건이 평범한 밤나무 숟가락의 여덟 배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알록달록하고 무거운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모양 외에는 나무 숟가락과 손톱만큼도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제조업체는 나무를 암시하는 이름을 붙여야만 우리의 마음과 부엌에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우리는 요리할 때 참으로 많은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저을 때나 나무 숟가락을 쓰지만 먹을 때는 금속 숟가락을 쓴다(옛날에는 먹을 때도 나무를 썼다). 뜨겁게 낼 음식과 날것으로 먹을 음식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어떤 재료는 끓이고 어떤 재료는 얼리거나 튀기거나 빻는다. 이런 행동은 대개 본능적이거나 레시피에 충실한 행동이다. 이탈리아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리소토는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익혀야 하지만 파스타는 많은 물에 재빨리 끓여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요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첫눈에는 당연해도 뜯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 늘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어떤 이유로든 채택되지 못한 도구는 또 얼마나 많은가. 수력을 이용한 거품기, 자기력을 이용한 꼬챙이 회전기. 저차원적 기술의 나무 숟가락이 믹서, 냉동실, 전자 레인지와 공존하는 현대의 훌륭한 부엌이 만들어지기까지는 크고 작은 수많은 발명들이 존재했지만, 그 역사를 드러내어 칭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통적인 기술사(技術史)는 음식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는다. 바퀴와 배, 화약과 전신, 비행선과 라디오 등 산업적, 군사적으로 굵직한 발전들에만 집중한다. 음식을 언급하더라도 가정의 부엌일보다는 농업의 맥락에서 경작과 관개 체계를 논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호두까기에도 총알 못지않게 많은 발명이 깃들어 있다. 군사용으로 발명된 기술이 훗날 부엌에서 더 유용해진 경우도 많다. 1913년에 셰필드 출신의 해리 브리얼리가 스테인리스스틸을 발명한 것은 총신을 개량하기 위해서였지만, 뜻밖에도 그는 세상의 식기를 개량했다. 전자 레인지를 만든 미국인 퍼시 스펜서는 원래 해군의 레이더를 연구했지만, 어쩌다 보니 새로운 요리법을 탄생시켰다. 부엌은 과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불 위에서 이것저것 섞는 요리사는 실험실의 화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적양배추의 색을 보존하기 위해서 식초를 넣고, 케이크 속 레몬의 산성을 중화시키기 위해 중탄산나트륨을 넣는다. 그런데 기술은 과학적 사고의 응용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기술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세상에는 우주에 대한 조직적 지식의 한 형태로서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활동이라는 의미의 형식적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도 있었다. 관찰, 예측, 가설로 구성된 체계에서 실험이 일익을 맡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은 17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반면에 요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은 까마득한 과거로 역사가 올라간다. 날카로운 석기로 날음식을 잘랐던 초기 석기시대 이래 인류는 늘 어떻게 하면 더 잘 먹을까 하는 문제에 창의력을 발휘해왔다.
기술을 뜻하는 영어 단어 ‘technology’는 예술, 솜씨, 기예를 뜻하는 그리스어 ‘techne’와 무엇인가를 연구한다는 뜻의 ‘logia’를 합친 것이다. 기술은 로봇 공학 따위만이 아니라 아주 인간적인 무엇이다. 기술은 때로 도구 자체를 뜻하고, 도구를 고안한 창의적 노하우를 뜻하기도 하며, 사람들이 다른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과학적 발견은 사용도에 따라 유효성이 달라지지 않지만 기술은 그렇다. 사용되지 않는 장치는 유효하지 않다. 아무리 기발하게 설계된 거품기라도 누군가 그것을 들고 달걀을 휘젓지 않는 한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다. (10-12쪽)
나의 아침 식사는 보통 커피, 토스트, 버터와 마멀레이드, 그리고 아이들이 다 마셔버리지 않았다면 오렌지 주스로 구성된다. 이렇게 구성만 나열하면 이 식사는 과거 350년의 어느 시점에도 어울렸을 것 같다. 영국인은 17세기 중반부터 커피를 마셨다. 오렌지로 주스와 마멀레이드를 만든 것은 1290년부터였다. 토스트와 버터는 고대의 음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이다.
나는 커피를 어떻게 만들까. 내가 1810년에 살았다면 물에 커피를 풀어 20분 끓인 뒤 아이징글라스(isinglass, 생선 부레에서 얻은 일종의 젤라틴)로 여과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는다. 1850년처럼 ‘과학적 럼퍼드 여과기’로 만들지도 않는다. 에드워드 시대풍으로 나무 숟가락과 주전자로 뜨거운 가루에 찬물을 부어 가라앉히지도 않는다. 내가 미국에 산다면 아직 전기 커피메이커를 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학생 때처럼 쓰기만 한 인스턴트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지도 않는다. 1990년대에는 프렌치 프레스를 썼지만 요즘은 보통 그것도 아니다. 나는 21세기의 커피 중독자답게(그러나 최신식 일본제 사이폰 여과기에 투자할 만큼 중독되지는 않았다) 그라인더로 원두(공정무역 제품)를 곱게 간 뒤, 카푸치노 기계와 다양한 도구들(커피 스쿱, 탬퍼, 우유를 데우는 용도의 스테인리스 스틸 컵)을 써서 플랫화이트(에스프레소에 데운 우유를 부은 것)를 만든다. 운이 좋은 날에는 10분쯤 집중해서 공을 들이면 기술이 잘 작동하여 커피와 우유가 맛있게 녹아든 거품 음료가 탄생한다. 운이 나쁜 날에는 도중에 뭔가 터져서 바닥에 엎질러진다.
토스트와 버터와 마멀레이드는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사랑받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나처럼 제빵기로 구운 통밀빵을 한 조각 잘라 4구식 전기 토스터에 구운 뒤 식기세척기용 흰 도자기 접시에 담은 토스트를 먹지는 않았다. 그는 잘 발리는 버터와 과일 함량이 높은 마멀레이드도 즐기지 못했다. 두 음식은 우리 집에 크고 잘 돌아가는 냉장고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마멀레이드는 오렌지가 아니라 퀸스로 만들었을 것이다. 내 버터는 산패하지 않았고 딱딱하지도 않다. 그런데 내가 아이였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거의 모든 버터가 그랬다. 나는 금속성 뒷말을 남기지 않고 마멀레이드 속 과당과 반응하지도 않는 스테인리스스틸 나이프로 버터를 바른다.
오렌지 주스는 어떨까, 주스의 과학은 지극히 단순해 보인다. 그냥 오렌지를 가져다가 즙을 짜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알고 보면 현실은 무척 복잡할 것이다. 오렌지를 원뿔형 유리 스퀴저에 힘들게 눌러 짰던 에드워드 시대의 주부와는 달리, 나는 (1963년 테트라 브릭이라는 상표로 처음 출시된) 팩 용기에서 주스를 따른��. 성분표시에는 100퍼센트 오렌지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 이 주스에는 황당하리만치 많은 산업 기반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모종의 효소로 과일을 찌그러뜨린 뒤 모종의 정화제로 즙을 여과했을 것이고, 살균과 냉각을 거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운송했을 것이다. 내 즐거운 아침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기술이 쓰였다. 주스가 써서 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일도 없다. 그것은 1970년대에 쓴맛을 내는 리모닌(limonin) 성분을 줄이는 기법을 개발하여 ‘쓴맛 제거’ 특허를 4개나 받았던 여성 발명가 린다 C. 브루스터 덕분이다.
이런 음식을 이런 방식으로 먹을 수 있었던 기간은 역사에서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를 말해주고, 우리가 사용하는 요리 및 식사 도구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들려준다. 사람들은 현대를 ‘기술의 시대’라고 말한다. 보통은 컴퓨터가 여기저기 널렸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그 나름의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이 꼭 미래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포크도 냄비도 단순한 계량컵도 기술이다.
어떤 도구는 단순히 먹는 즐거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나 요리 도구가 중차대한 생존의 문제일 때도 있다. 약 1만 년 전 냄비가 없었던 시절의 유골들을 보면, 치아가 몽땅 빠진 사람이 성인기까지 살아남은 예는 하나도 없었다. 씹기는 필수불가결한 기술이었다. 씹지 못하면 굶었다. 그러나 토기가 발명되자, 선조들은 죽이나 수프처럼 씹지 않고 마셔도 될 만큼 걸쭉한 혼합물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이가 하나도 없는 성인의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냄비가 그들을 살렸다. (13~15쪽)
요리사들은 보수적이다. 그들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작업을 매일, 심지어 매년 묵묵히 반복적으로 해내는 데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때로는 특수한 조리 방식을 둘러싸고 문화 전체가 형성된다. 진정한 중국 요리는 중국식 식칼과 웍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다. 넓적하게 생긴 칼이 모든 재료를 한 입 크기로 썰면 웍이 그것을 재빨리 볶는다. 둘 중 무엇이 먼저였을까? 볶음 요리? 웍? 둘 다 아니다. 중국 요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연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웍으로 잽싸게 볶는 기법은 원래 땔감이 부족해서 생긴 방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도구와 음식이 하나로 얽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말할 수 없게 된다.
요리사가 부엌의 혁신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평의 내용은 늘 같다. 새로운 방법 때문에 우리가 익숙하고 좋아하는 음식이 망쳐진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상업화된 냉장 기능은 소비자나 식품 산업 모두에 큰 이익이었다. 냉장고는 우유처럼 쉽게 상하는 음식을 보관하는 데에 특히 유용했다. 그전에는 전 세계 대도시에서 상한 우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매년 수천 명이었다. 냉장은 유통업자에게도 유익했다. 식품의 판매기간을 늘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판매자와 구매자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신기술을 두려워했다. 소비자는 냉장된 음식을 미심쩍어했고, 유통업자는 유통업자대로 냉기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랐다. 1890년대 파리 레알 시장의 판매자들은 냉장이 식품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했다. 일면 옳은 생각이었다. 상온에 둔 토마토와 냉장고 속 토마토를 비교해본 사람은 알 텐데, 전자는 (좋은 토마토라면) 향이 달콤하고 즙이 풍부하지만 후자는 퍼석하고 금속 맛이 나고 밍밍하다. 모든 신기술은 득과 실이 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가끔은 잃는 것이 지식일 때도 있다. 푸드 프로세서(food processor)가 있는 사람은 칼질이 뛰어날 필요가 없다. 가스나 전기 오븐, 전자 레인지가 있으면 불을 지피고 유지하는 방법을 알 필요가 없다. 100여 년 전만 해도 불씨 관리는 인간의 중요한 활동이었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갔다(매일 몇 시간씩 힘들게 매달려야 했고 그 때문에 다른 활동은 포기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잘된 일이다). 그러나 더 큰 의문은 인간의 노동력 투입을 최소화하는 기술들이 정말로 요리 실력의 종말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이다. 2011년 영국의 18-25세 인구 2,000명을 조사한 결과, 과반수는 볼로네제 스파게티처럼 간단한 요리조차 할 줄 모르는 채 독립했다고 응답했다. 전자레인지와 간편식품의 결합은 버튼만 몇 번 눌러도 먹고살 수 있는 자유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가 손수 마련하는 식사의 의미를 깡그리 잊는다면, 그다지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거꾸로 신기술 덕분에 옛 기술을 더 음미하게 될 때도 있다. 나는 블렌더를 쓰면 홀란데이즈 소스를 30초 만에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중탕기와 나무 숟가락을 써서 버터를 달걀 노른자에 조금씩 추가하는 옛 방식을 오히려 더 음미하게 되었다.
부엌 용품의 역사는 음식의 역사에 비하면 하찮아 보일 수 있다. 상차림과 젤리 틀에 대해서 시시콜콜 법석을 피우는 것은 좋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허기와 비교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금까지 음식의 역사에서 부엌 용품이 무시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리의 역사는 지난 20년 동안 각광받는 주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동안 등장한 역사적 서술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압도적으로 기법보다 재료, 즉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요리하느냐에 집중했다. 그동안 ��자, 대구, 초콜릿에 대한 책이 나왔고 요리책, 식당, 요리사들에 대한 역사책이 나왔다. 그러나 부엌과 도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이야기의 절반이 사라진 셈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도구와 기법으로 재료를 손질함으로써 음식의 질감, 맛, 영양, 문화적 의미를 바꾸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엌 기술은 인류를 바꾸었다. 무엇을 먹느냐는 물론이고 어떻게 먹느냐까지. 부엌 용품의 변화가 폭넓은 사회적 변화와 나란히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꿈꾸던 부엌을 가지게 되어 인생이 달라졌어요’하는 뜻만은 아니다. 가령 노동력 절감 도구와 하인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기술 정체(停滯)의 이야기였다. 잘사는 집안들이 부엌일을 맡길 노동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요리를 덜 고되게 만드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푸드 프로세서와 블렌더는 정말로 해방적인 도구이다. 덕분에 키베를 만드는 레바논 사람도 생강-마늘 퓨레를 만드는 인도 사람도 더 이상 팔을 혹사할 필요가 없다. 한때 고통의 양념을 듬뿍 쳐야 했던 음식들이 요즘은 고통 없이 만들어진다.
부엌 용품은 우리의 몸도 바꾸어놓았다. 현대인의 비만 위기는 부분적으로나마 음식의 종류 때문이 아니라 가공방식 탓이라는 증거가 있다(물론 종류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 현상을 ‘칼로리 망상(Calorie Delusion)’이라고도 부른다. 2003년 일본 규슈 대학교의 과학자들은 한 그룹의 쥐들에는 딱딱한 먹이를 주고 다른 그룹에는 부드러운 먹이를 주는 실험을 했다. 다른 면에서는 똑 같은 먹이로 영양도 칼로리도 같았다. 그런데 22주일 뒤, 부드러운 먹이를 먹은 쥐들만 비만이 되었다. 이것은 음식의 질감이 체중 증가에 중요한 요인임을 보여준 결과였다. 비단뱀을 대상으로 한 후속 실험도 결과가 같았다(갈아서 익힌 고기를 먹은 뱀들 대 날고기를 먹은 뱀들). 덜 가공되어 더 많이 씹어야 하는 음식은 소화에 더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몸이 취하는 칼로리가 적어진다. 명시된 칼로리는 같더라도 익힌 사과 퓨레를 먹으면 아삭한 사과를 생으로 먹을 때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흡수하는 것이다. 칼로리라는 조악한 단위(영양학자 앳워터의 제안에 따라 19세기 말에 협의된 체계)로 영양 정보를 보여주는 식품 성분표는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사례는 요리 기술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음식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기술의 역사였다. 불이 없으면 요리도 없다. 인류는 불을 지피는 방법을 발견하고 나아가 요리의 기예를 익힘으로써 유인원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했다. 초기 수렵채집인에게는 요리 보조기구나 전기 그릴은 없었지만 나름의 부엌 기술이 있었다. 그들은 뭉툭한 돌로 음식을 찧었고, 날카로운 돌로 음식을 썰었다. 두 손을 날렵하게 사용함으로써 독과 벌레를 용케 피하면서도 먹을 수 있는 견과와 열매를 땄다. 높은 바위 틈에서 꿀을 거두었고, 바다표범 구이에서 흐르는 기름을 홍합 껍데기로 받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창의성만큼은 부족하지 않았다. (17~20쪽)
절구처럼 면면히 이어진 기술 뒤에는 가뭇없이 사라진 기술이 훨씬 더 많았다. 우리에게는 이제 사과술 단지, 고기 거는 갈고리, 살점 찢는 포크, 약초 단지, 가마솥 걸이, 머핀에 설탕 치는 통 따 따위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일 뿌리는 통, 전기 허브 분쇄기, 아이스크림 스쿱이 쓸데없는 잉여물이 아니듯이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런 물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잘한 부엌 용품은 그 사회가 무엇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준다. 조지 왕조 사람들은 구운 골수를 좋아했기 때문에 골수를 파먹는 전용 은 숟가락을 만들었다. 마야인들은 조롱박에 한껏 재주를 부여서 그것으로 초콜릿을 마셨다. 요즘 부엌 용품 가게를 구경해보면 현재 서구인들이 집착하는 것은 에스프레소와 파니니와 컵케이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기술은 가능한 것들로 구현된 예술이다. 더 맛있는 컵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든 단순히 생존하겠다는 욕망이든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욕망이 기술의 원동력이지만, 기술은 당시 주어진 재료와 지식에도 좌우된다. 캔에 음식을 저장하는 기법은 캔을 쉽게 이용하는 기법보다 한참 앞서서 개발되었다. 니콜라 아페르가 혁신적인 캔 보존기법으로 특허를 낸 것은 1812년이었고, 런던 버몬지에 최초로 캔 공장이 세워진 것은 1813년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캔 따개는 그로부터 50년 뒤에 등장했다.
새로운 장치가 탄생하면 사람들은 그 신선함이 사라질 때까지 광적으로 남용하곤 한다. 20세기 경영이론의 권위자인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망치를 쥔 사람의 눈에는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엌에서도 그렇다. 방금 전기 블렌더를 구입한 여자의 눈에는 온 세상이 수프로 보인다.
모든 발명품이 예전에 비해서 명백히 발전된 물건인 것은 아니다. 우리집 찬장은 사그라진 열정들의 묘지이다. 내가 생활이 달라지리라고 믿고 구입했지만 씻기 번거롭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기 주스기, 1년은 멀쩡했지만 이후로는 밥을 하는 족족 태워버린 전기 밥솥, 저녁 파티에 호화로운 크렘브륄레를 낼 수 있으리라 상상하고 샀지만 그런 파티를 한번도 열지 않아 처박힌 분젠 버너(Bunsen burner). 누구나 별 의미가 없는 듯한 조리 기구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멜론 속을 파는 기구, 아보카도 자르는 기구, 마늘 까는 기구. 대신 숟가락, 칼, 손가락으로 안 될 것이 없지 않은가? 세상에는 우리의 요리를 도우면서도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는 공학적 발명이 많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일으키는 물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어떤 기구들은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기는 하지만 그 대가를 요구한다.
“기술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중립적이지도 않다.” 기술사학자들이 크란츠버그 제1법칙이라고 부르며 곧잘 인용하는 명제이다(멜빈 크란츠버그가 1986년의 기념비적 에세이에서 썼던 말이다). 이 말은 부엌에서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 도구는 진화하는 사회적 맥락에 발맞추어 변한다. 절구는 주인의 쾌락을 위해서 몇 시간씩 재료를 찧어 철저히 섞었던 고대 로마의 노예에게, 그리고 순전히 재미로 페스토를 만드는 내게 전혀 다른 물건이다. (22~23쪽)
부엌 용품은, 특히 쇼핑 채널에서 판매하는 화려하고 값비싼 종류들은 생활을 바꾸어놓을 물건이라는 문구로 선전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생활이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바뀔 때가 많다. 우리가 전기 믹서를 샀다고 하자. 믹서를 쓰면 대단히 쉽고 빠르게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케이크를 꼭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믹서를 사기 전에는 케이크 만들기가 워낙 번거로워서 사 먹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믹서가 시간을 아껴주기는커녕 빼앗은 셈이다. 믹서 놓은 자리를 마련하느라고 귀중한 조리대 공간을 몇 센티미터나 포기해야 하는 부작용도 있다. 컵과 부속물 씻는 시간, 믹서가 사방에 흩뿌린 밀가루를 훔치는 시간도 있다.
어떤 기술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그것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기본적인 도구라도 세상의 누군가는 ‘번거롭게 그런 것까지 쓸 필요는 없어’하며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론 대개의 부엌들은 실제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당신의 서랍이 밀개, 강판, 뒤집개 따위로 꽉 차서 열리지 않을 지경이라면 몇 가지 기술을 버릴 때가 된 것이다.
숙련된 요리사는 극단적인 경우라면 날이 선 칼, 나무 도마, 스킬렛, 숟가락, 모종의 열원만 가지고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고 싶은가? 요리의 재미 중 하나는 먹을 것을 입에 넣는 이 만고불변의 사업이 시대에 따라 미묘하게 변한다는 점이다. 당잠하건대 앞으로 10-20년이 더 지나면 나의 아침 식사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여전히 커피, 토스트, 버터, 마멀레이드, 주스라는 메뉴를 고집하더라도 말이다. 과거를 참고하여 예측하자면, 한때 너무 당연하다고 느꼈던 방법들 중 몇 가지는 돌연 적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제빵기를 산 것을 벌써 후회하��� 있다. 생김새가 흉물스러운 데다가 한 가운데 주걱 같은 부품 때문에 빵 중앙에 늘 구멍이 뚫린다. 그래서 빵집에서 괜찮은 발효빵을 사거나 손으로 직접 만드는 옛 방식으로 회귀하고 있다. 나의 에스프레소 기계는 이 책을 쓰는 동안 드디어 고장이 났다. 그런데 마침 나는 에어로프레스(AeroPress)라는 놀라운 기구를 발견했다. 공기 압력을 이용해서 잉크처럼 진한 커리를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값도 싸고 수동기구이다. 마멀레이드로 말하자면, 자동 잼 기계를 사볼까 고민하는 중이다. (24~25쪽)
포크를 생각하다 - 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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